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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청소년 문학

[스크랩] 시인 백석의 `통영 사랑` ...여인에 대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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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의 고장 '통영'
고뇌 속에 살다간 인간 이순신에 감동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백석, <통영> 앞 부분)새해 첫 여행지로 통영을 선택했다. ‘바람맛도 물맛도 짭짤’하고 ‘전복, 해삼, 도미, 가재미 같은 생선’도 좋고 ‘파래, 아개미, 호로기의 젓갈’도 맛있고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우’는 곳. 정말 통영은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이미 몇 번 다녀온 곳이지만 통영은 여전히 나에게 꿈의 여행지이다. 사춘기 시절, 유치환의 <행복>을 읽고 통영에 꼭 가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우체국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쓰는 풍경을 그렸다. 대학에 와서 김춘수의 <처용단장>을 읽으면서 3월의 바다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듣고 산도화에 살포시 내려앉는 눈송이를 지켜보고 싶었다. 대학 4학년 때 졸업논문을 생각하면서 백석의 <통영>에 매료되기도 했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대상이 오히려 슬플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통영은 나에게 멀었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켜가려고 해도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는 길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오히려 문학과는 거리가 있을 법한 이순신이었다.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평생을 고뇌 속에서 살아간 인간 이순신에게 감동을 느끼면서 나는 그분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 흔적의 한 가운데에도 바로 통영이 있었다.
순수는 / 그저 아름다운 것이다. // 세월에 세월이 / 밀리는 기슭 // 좋아한다는 것은 / 행복한 출렁거림이다.(정영자, <통영, 그 바다> 전문)
통영은 바다에서 바다로 끝나는 곳이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곳곳에 머물러 존재한다. 바다 내음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통영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 속에서 숨을 쉰다. 세월에 세월이 밀리면서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지만 통영은 여전히 아름답다.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어요.’하는 시장 아주머니의 목소리에도 통영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통영항이 가장 명품이지요.’하는 남망산 조각공원에서 만난 공원 관리인에게도 통영 사랑이 느껴진다. 청마문학관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생명을 노래한 청마의 본질은 바로 통영의 마음이기도 하지요.’라고 하던 지방 예술가의 통영 자랑도 각별했다. 김춘수 생가에서 만난 주인 아주머니, 청마거리에서 커피를 나누었던 대학생, 중앙 우체국 주차장 관리 아저씨, 박경리 생가를 찾아 골목길을 방황하다가 만났던 슈퍼 주인 아저씨, 미륵도 달아공원에서 시화를 팔고 계시던 할아버지, 충렬사, 세병관 등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 그 모두의 마음에도 통영의 푸른 바다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난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시조시인 김상옥과 관련된 곳, 화가 전혁림의 그림이 전시된 전혁림 미술관, 음악가 윤이상의 생가터, 통영운하의 아름다운 야경, 중앙시장의 싱싱한 바다고기 등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통영은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땅인 셈이다. 그리움의 바다인 셈이다. 앞으로 내 문학기행의 가장 중요한 길에 자리했던 통영의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분명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행복한 출렁거림이다. 이제 바다, 생명, 문학 그리고 통제영의 고장 통영으로 가 볼까?


시인 백석의 '통영 사랑'
바다, 생명, 문학 그리고 통제영의 고장…여인에 대한 그리움 통영사랑으로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이라는 시인으로부터 통영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통영 사람이 아니면서도 가장 통영 사람을 닮은 사람이 바로 백석이다. 백석의 통영 사랑은 각별하다. 그의 시에는 '창원도', '고성가도', '삼천포', 마지막으로 '통영'까지 남쪽 지방의 지역명이 많이 나온다. 경상북도 영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오랫동안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내가 통영을 그리는 마음도 백석과 다르지 않을 게다.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석, ‘통영1’ 전문)
유월의 바다에 내리는 비는 쓸쓸하다. 특히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천희라는 이름을 지닌 처녀들에겐 더욱 그렇다. 쓸쓸함은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표현에서 더욱 배가된다. 백석은 아직도 만나지 못한 통영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직 백석에게 있어 통영은 마른 굴껍질이었고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이었고 '김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곳이었고 '낡은 항구'였던 셈이다.
하지만 백석은 1935년 6월 통영을 직접 방문한다. 그 당시 같은 직장(조선일보)에 다니던 친구 신중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백석은 영원한 연인이 된 통영처녀를 만나 첫눈에 반해 버린다. 그녀가 바로 '난'이다. 당연히 통영을 그리는 백석의 언어도 달라진다. 이제 통영은 백석에게 비가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 아니라 북소리가 들리고 뱃고동이 우는 살아있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당연히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리라. 백석은 그 해 겨울 두 번째로 통영을 방문한다. 시 내용을 볼 때 구마산 선창에서 배를 타고 통영항으로 오는 여정이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통영은 이미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 되어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다의 바람도 백석의 마음을 가로막지 못했다.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 '통영2' 부분)
하지만 이 방문에서 백석은 '난'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 '난'을 만나지 못한다. 명정골에 살았던 '난'은 개학준비를 하느라 서울로 떠나버리고 없었다. 그래도 백석은 그녀가 사는 명정골을 찾아간다. 명정골은 지금의 통영시 명정동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백석도 그녀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을 것이며 그녀의 사는 마을이 보고 싶어 찾았을 게다. 결국 백석은 '옛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 어긋나버린 길 끝자락에서 그저 '손방아만 찧다' 돌아서야 했다.
시인 백석의 '통영 사랑'②
 
 
 
어쩌면 백석은 이미 '난'과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예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다.'고 표현했다. 결국 백석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선일보에서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직장을 옮긴 백석은 1936년 12월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난'의 부모를 찾아가 '난'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말하지만 끝내 거절당하고 만다. 뒤이어 '난'은 파혼상태였던 친구 신중현과 결혼을 해 버린다.통영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함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저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루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백석, '통영(統營)-남행시초2' 전문)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 마음을 통영에서 서울로 가는 마지막에 남긴 백석의 시 '통영(統營)-남행시초2'에서 짐작하는 것은 무리일까. 큰 장이었던 통영장을 구경하면서도, 품바타령을 들으면서도 그는 열이레 달을 보면서 '판데목'을 조용히 지나간다. 통영장의 흥청거림도, 품바타령의 흥겨움 앞에서도 백석은 그냥 관찰자일 뿐이다.
같은 남행시초에서 보여주었던 찬사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창원도),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고성가도),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삼천포)와는 달리 전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안으로 삭이는 엄청난 절제. 어쩌면 그 절제 속에서 백석의 울음은 더욱 절절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명정골의 우물은 맑디 맑음을 자랑하지만 명정동 산복도로가 나는 바람에 충렬사와 명정 우물 사이가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새로 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세월만큼이나 오래도록 백석은 충렬사 그 돌계단 위에 앉아서 사랑하는 여인 '난'이 명정골 우물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우물터로 향했다.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는 이름을 지닌 두 개의 우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용하지 않아 몇 개의 쓰레기가 보이긴 했으나 우물물은 여전히 맑았다. 그 옆에는 빨래터였을 법한 공터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통영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길로 상여를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상여가 지나가면 우물물이 흐려지고 그 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충렬사 앞으로는 네거리가 위태롭게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충렬사로 인해 네거리를 반듯하게 정리하지 못한 듯하다. 충렬사 계단에 앉아 잠시 상상에 빠졌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아파했던 백석의 마음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담긴 시를 다시 읽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부분)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1938년 백석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만 1940년 만주로 떠난다. 물론 그 사이에 '자야'라는 기생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리고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백석은 우리 문학사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인사가 되고 만다.


여전히 기다렸고.


출처 : ★땡칠이★ 음악세상
글쓴이 : ★땡칠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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