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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의 고장 '통영' 고뇌 속에 살다간 인간 이순신에 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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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하게도 통영은 나에게 멀었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켜가려고 해도 스치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는 길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오히려 문학과는 거리가 있을 법한 이순신이었다.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평생을 고뇌 속에서 살아간 인간 이순신에게 감동을 느끼면서 나는 그분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 흔적의 한 가운데에도 바로 통영이 있었다. 순수는 / 그저 아름다운 것이다. // 세월에 세월이 / 밀리는 기슭 // 좋아한다는 것은 / 행복한 출렁거림이다.(정영자, <통영, 그 바다> 전문) 그런데 아직도 난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시조시인 김상옥과 관련된 곳, 화가 전혁림의 그림이 전시된 전혁림 미술관, 음악가 윤이상의 생가터, 통영운하의 아름다운 야경, 중앙시장의 싱싱한 바다고기 등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통영은 여전히 나에게는 미지의 땅인 셈이다. 그리움의 바다인 셈이다. 앞으로 내 문학기행의 가장 중요한 길에 자리했던 통영의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분명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행복한 출렁거림이다. 이제 바다, 생명, 문학 그리고 통제영의 고장 통영으로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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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의 '통영 사랑'② | ||||||||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함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저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루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백석, '통영(統營)-남행시초2' 전문)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 마음을 통영에서 서울로 가는 마지막에 남긴 백석의 시 '통영(統營)-남행시초2'에서 짐작하는 것은 무리일까. 큰 장이었던 통영장을 구경하면서도, 품바타령을 들으면서도 그는 열이레 달을 보면서 '판데목'을 조용히 지나간다. 통영장의 흥청거림도, 품바타령의 흥겨움 앞에서도 백석은 그냥 관찰자일 뿐이다. 같은 남행시초에서 보여주었던 찬사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창원도),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고성가도),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삼천포)와는 달리 전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안으로 삭이는 엄청난 절제. 어쩌면 그 절제 속에서 백석의 울음은 더욱 절절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명정골의 우물은 맑디 맑음을 자랑하지만 명정동 산복도로가 나는 바람에 충렬사와 명정 우물 사이가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새로 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세월만큼이나 오래도록 백석은 충렬사 그 돌계단 위에 앉아서 사랑하는 여인 '난'이 명정골 우물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우물터로 향했다.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는 이름을 지닌 두 개의 우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용하지 않아 몇 개의 쓰레기가 보이긴 했으나 우물물은 여전히 맑았다. 그 옆에는 빨래터였을 법한 공터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통영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길로 상여를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상여가 지나가면 우물물이 흐려지고 그 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충렬사 앞으로는 네거리가 위태롭게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충렬사로 인해 네거리를 반듯하게 정리하지 못한 듯하다. 충렬사 계단에 앉아 잠시 상상에 빠졌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아파했던 백석의 마음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담긴 시를 다시 읽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부분)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1938년 백석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만 1940년 만주로 떠난다. 물론 그 사이에 '자야'라는 기생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리고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백석은 우리 문학사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인사가 되고 만다. 여전히 기다렸고. |
출처 : ★땡칠이★ 음악세상
글쓴이 : ★땡칠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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