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희 글, 오승민 그림/ 낮은산/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궁금했다. 그러나 이미 표지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갖을 수 밖에 없었다. 표지 이쪽 저쪽을 살펴보았다. 뒷표지에 쓰여진 글을 읽으면서 읽을 맛이 떨어졌다. 너무 작가의 목소리가 겉으로 드러나서 세련미가 반감되었다. 꼭 그렇게 설명했어야 했을까. 뒷 표지 독백이 나오기 이전까지가 더 좋았다. 그래도 이 작품은 무난하다. 괜스레 뒷에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산만해지고 긴장미도 떨어지고 교훈성만 그득해서 참 재미없는 책이구나 싶을 정도로 감동이 한꺼번에 폭삭 주저앉은 느낌이었다.
표지를 보면 왕관 쓴 아이가 발 밑의 집들을 바라보고 있다. 재개발 되려는 허름한 집들의 불빛이 각양각색이다. 아마 작가나 화가는 그런 사람들의 희망을 창문의 불빛으로 나타내고자 한 듯 하다. 강아지똥의 부스러지는 느낌도 아니면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싯점은 6학년 나이다. 화자를 통해서 새학년의 교실 풍경이 훤하게 그려지고 있다. 왕따 당하는 아이의 심정을 곰살궂게 살펴가며 그리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지만 이미 그림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라는 아이가 모퉁이에서 얼굴의 형체도 없이 시꺼멓게 그려져 있다.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겠지. 아이들 모습도 뚜렷한 형태가 없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그만큼의 모호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지만 바탕이 초록이어서 뭔지 모를 이야기의 반전이 기대되고 암시하고 있다.
아이들이 잔뜩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더 더욱 움추러든다. 빨리 어느 그룹에 끼어서 자기가 혼자라는 것을 표내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내면 독백에 의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갈등이 다음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검은 바탕에 분홍색 화면 속에서 눈을 한쪽만 살며시 내놓고 살피는 모습이 불안하기 그지 없다.
같은 반 했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오히려 야유와 모멸을 받으면서 개미가 되고 싶다는 아이는 점점 작아질 것 같이 땅을 쳐다보고 울상이면서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얼마나 마음이 움추러 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때 구세주처럼 춘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밝아지고 한눈에 봐도 씩씩한 모습이다. 그림으로만 보면 남자같다. 내적 흥분 상태를 붉은 배경으로 하고 나는 춘자가 또 다시 장난을 쳐서 자기를 버릴까봐 방어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 부분에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이런 심정을 늘 갖고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다. 저 정도까지 두려워하고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렸다.
장면이 노란빛으로 바뀌면서 작중 화자와 또 다른 화자인 춘자가 아주 발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내가 춘자를 얼마나 신뢰하고 우러러 보는지 그림의 구도 속에서도 알 수 있게 위치를 잡아놨다. 춘자가 남자애들과 너무 잘 어울려 놀다가 내 곁에 와서 자기가 공주라고 또박 또박 이야기를 해서 농담인 줄 알고 지나간다.
그 다음은 또 다른 암시인 선생님의 꾸중이다. 작은 실내화를 구겨신었다가 야단을 맞으면서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오라는 야단을 맞는다. 내가 벌을 대신 서 줄 수는 없지만 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실천되어지는 것은 없다. 이 부분이 결국 졸업을 하고 만나지 못하다가 주유소 앞에서 홍보 댄스를 하는 춘자를 얼핏 보는 것으로 매듭을 짓고 있다. 참으로 짜증이 났다. 나라는 아이는 결국 마음만 있고 행동으로는 춘자에게 이끌린 것 빼놓고는 스스로 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동정심은 인간 관계를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오히려 춘자는 자기집에 데려가고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밀가루 부침을 병든 아버지에게 먹이고 그 아픈 아버지의 공주라 부르며 힘없는 자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공주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공주라는 것의 계급성을 지칭하는 의미는 뒤로 하더라도 지금 처해진 상황을 잊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굉장한 반전을 느꼈지만 그 만큼의 안일한 작가 의식이 드러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전반부에 잘 이끌어가던 긴장미가 춘자의 공주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데 그렇게라도 꿈꾸면서 현실을 잊고 이겨나가라고? 자기 최면을 걸라는 주문인가? 뭘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다가 굴삭기에 �겨나가고 말아야 하나? 더구나 무책임하게 나는 그 뒤의 춘자 소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그렇게 단짝으로 다닌 친구의 연락처 하나 없이 졸업 뒤에 만나지 못한 것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이미 작가는 춘자의 계급성에 대한 대안이나 대책에 대한 회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현실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저렇게 단순하게 플롯을 끌어갔을까?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더구나 군더더기 같은 지금의 내가 왕따를 극복한 것은 너 때문이었다는 공치사를 중얼거리기에는 너무도 안이한 결말이다.
중반까지 이끌어가던 내면 묘사가 사라지고 작가 목소리가 직접 말하는 부분부터 이 작품은 상당히 작위적이다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끝까지 지지부진했다. 그 현실을 바라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그래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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