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어당 앞에 있는 살구나무, '살고 보자'라 해서 살구나무가 되었다는 안내문이 웃게 했다.
비가 올까 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많이 참아주었다. 다 보고 난 뒤에 내려오는 기차에서 비를 만났다. 오래간만에 덕수궁 돌담길을 한 바퀴 돌았다. 덕수궁 후원을 잘라먹은 미대사관 주변에 경계를 서느라 우리나라 앳된 군인들이 고생을 했다. 정동교회도 세실 극장도 겉모습만 보고 더 욕심내지 않았다. 맞춤한 거리였다.
덧붙이는 글
자수라는 분야가 여성들에게는 힐링이 되기도 했지만 가부장제의 기준이 되기도 한 것이다. 천한 계급이라는 사람들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할 일이다. 양반이나 귀족 가문에서나 행했을 일이다. 여자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베갯잇 수놓기, 병풍 수놓기, 가림막 수놓기 등으로 결혼 전에 해놓아야 할 덕목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실과 시간에 한 8폭 병풍 수놓기 기억이 난다. 가장 먼저 끝냈다고 나를 예뻐해 주셨던 사회 선생님이 하나를 또 부탁하셨다. 내가 먼저 한 것을 드리고 다시 수놓아야 했었다. 그런데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시기여서 다음에 해야지 하고 싸가지고 다니다가 이사 다니면서 어느 순간 버렸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해봤기 때문에 자수가 얼마나 집중과 고립이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여럿이 함께 하면 흐트러지기 때문에 자수 놓을 때는 혼자 조용한 분위기에서 해야 실수가 적어진다.
더구나 일제 시대에 극성을 부린 듯 전시한 작품들이 대부분 1937년 즈음 작품들이다. 협동작은 여고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수는 1970년 즈음 작품들이 다수였다. 이것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에 본 가리개도 유아시절에는 동양자수였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서양자수가 흔했다. 특히 프랑스 자수가 많아지기 시작했었다.
제사를 지내는 집에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8쪽 병풍이 대부분 있었다. 우리 집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 뒷쪽은 한문이 쓰여 있고, 앞쪽은 신선들이 있는 그림이었다. 오빠네 갔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아서 애석하다.
1937년 즈음이면 일제 발악의 시작이 한창일 때이고, 1970년 즈음에는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 절정을 이룰 때이다. 견뎌야 하는 수동적인 자수, 혁명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방책으로 권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특 스쳤다.
또 몇몇 장인들의 작품으로 전시관을 채운 것도, 조선시대 병풍과 자수도 많았으련만 제외된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제목이 근현대 자수이겠지만 말이다. 조명이 너무 낮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도 흠이었다. 적어도 2시간 이상 보아야 하는데 쉴 공간이 적어서 그것도 보완해주었으면 한다.
비 오는 화요일인데도 사람들이 붐볐다. 주로 초로의 여성들이 모여서 다니고 부부 동반도 예전보다는 많아졌다.
정비되어 모습을 드러낸 석어당도 옻칠이 더해진 듯 산뜻하고 기품이 있었고, 광명문이 덩그렇게 제 위치에 놓였건만 허전하고 쓸쓸하다. 중화전부터 이어지는 담장이 복원되었으면 한다. 예전에 광명문 자리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었는데 치어졌고 광명문 자리에 있던 해시계와 물시계는 어디로 보내졌는지 싶어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석조전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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