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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청소년 문학

<<나의 스파링 파트너>> 박하령 (지은이)/자음과모음/2020-02-06

글차례

1. 굴러라, 공! - 홍모가 반 친구들 외모 평가하는 것을 장난이라고 계속할 때 다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모습이다. 외모 평가에 대한 무감증, 외모 평가는 한 사람의 인격권을 침해한다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인식 수준을 지적하고 있다. 

접어둔 쪽은 19쪽 ~5줄: 나는 그들 안에 비로소 새롭게 싹트기 시작했을 폭력에 집중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폭력이 탄생하는 과정이랄까? 폭력은 일종의 작용 ,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태어나며 애초에는 없었으나 무언가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박스 안에 든 썩은 귤 하나가 옆에 있는 것까지 썩게 만들듯이 말이다.

이 문장에서 홍모는 성희롱을 장난삼아 하고 있는 부분인데 대부분 응대하지 않는 점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왜 다수는 침묵하고 외면하고 무시한다면서 모르는 척 하고 있을까. 왜? 

그에 비해 비싼 자전거 분실에는 모두 관심을 보이는 까닭은 뭘까. 양가적 감정일 듯 하다. 꼬시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가져가버릴껄 하는 아쉬움. 

CCTV가 먹통이라서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 홍모의 태도에 대한 지적이다. 가차없던 태도에서 상대방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척하는 여유는 어리숙한 상대에게는 늘상 먹혔던 수법 아닐까. 도덕성에 호소하지 않았던 홍모의 태도 변화는 현실적인 것인지 아니면 가능성 없는 것에 대한 낙담을 맣하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정의 공'을 사적으로 굴리는 것이 정당한지 아니면 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독자에게 생각을 강권하고 있다. '정의 공'을 꼭 사적으로 굴려야 할까?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처럼 개인적인 해결방법이 올바를까? 토론거리다. 

2. 여름을 깨물다

미투에 휘말린 아버지를 둔 딸은 순수할 수 없다는 편견에 대해 고발을 하고 있다. 이모가 있는 시골로 몸을 피했지만 모두 모르는 척 해줬던 거였다는 점을 가장 친절을 베푼 친구 입에서 '순수'하지 못하다고 판정을 받았을 때 오는 열패감이 그저 도망쳐 오는 것으로 마무리질 일인가 싶었다. 더구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해 여름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려. 생인손을 앓는 손가락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슴은 떨림의 통증으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야'라고 회상하는 첫 문장은 무언가. '감히, 어디 ... 더러운 핏줄을 가진 게'라는 말에서 온 비수는 두가지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아이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모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깨진 것, 알고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해준 것이었다는 깨달음. 또 하나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체로 보는 편견, 왜곡을 극복할 수 없다는 나약함. 

그래서 서울로 도망쳐 온 뒤에 다시 회상하는 거라는 것은 나는 나라고 이야기 하며 그 여름을 깨물 수 있다라고 자신하는 것일 뿐 정말 극복되었을까는 미덥지 않다. 이 사건을 통해 아버지로 인한 오해를 자신은 풀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주변들에게는 설명할 수도 그와 같은 질시의 눈초리에 대적할 힘이 생겼다고 보기 어렵다. 도망치지 말고 말해야 했다. 그 아이들 앞에서 나는 나라고. 그런 뒤에 떠나도 되었는데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후회 가득한 회고를 하고 있다. 

 

3. 수아가 집으로 가는 시간 

양가적 감정이 동생이 있는 가족들 사이에 빚어지는 일을 잘 잡았다. 수아라는 가깝지도 않은 먼 친척의 등장으로 인해 무조건 양보하는 것이 미덕이고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최고였던 자신감이 억울하고 빈정 상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답답해 하는 심리묘사가 좋았다. 대부분 '착한 이미지'는 이렇게 스스로 갇혀 지내야 하고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굴레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아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수아가 떠나고 얼마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런 일 한 번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내적 갈등으로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간접 체험으로라도 여러번 경험을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주고 있다. 


4. 너는 나의 스파링 파트너

제목을 붙일 만큼 대표작인데 가장 불만스런 작품이었다. 설정이 너무 억지스러웠다. 그 놈이 4층에 살고 있고 아버지가 그 놈을 집안으로 불러들여서 살갑게 대하는 부분도 그렇다. 아무리 가족에게는 '됐고'를 외치는 사람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살가울 수 있을까. 또 하나는 아버지의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주문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자리를 피한 것이라는 핑계이다.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것을 어겼는데 누군가에게 들켰다는 점, 누군지 모르지만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피하고 싶었던 심정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더 주인공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과도하게 모두 아버지를 핑계로 대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그런 자리를 피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 더 먼저여야 했다. 

더구나 동생인 현선이가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오빠였다면 그 놈에게 그리 질질 끌려다니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리고 집안까지 드나들던 그 놈이 어떻게 '끝'이라고 했다고 관계가 정리가 될까. 그리고 고양이 구출 작전을 하면서 자신이 그 동안 미뤄두었던 자신의 모든 잘못을 아빠의 억압과 간섭이라고 스스로 위폐를 당했던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양심을 찌른 누군가를 구해줘야 했던 순간의 기억과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 옳지 못했다는 것을 오히려 그놈의 등장으로 되새김할 기회가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5. 마이 페이스(My pace)

극단의 비교가 억지스런 설정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비극적 상황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얼굴만 살아있는 언니를 위해 동생은 화장을 시켜주고 꾸며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욕창이 걸리지 않도록 몸을 이리저리 돌려주고 마사지를 해주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그 동생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똑같은 욕구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그 언니 때문에 울컥했다. 사회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삶은 잉여인간이라고 내 스스로를 다구치며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기저귀를 차고 살아도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자기 속도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것이 누군가의 잣대로 이야기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행간 속에 숨겨서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삶에 기획사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삶이 과연 제대로 자기다운 삶인지를 생각해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픈 언니를 보살펴야 하는 동생의 당당함도 사랑스러웠다. 뭐가 어때서. 내가 사는 삶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꺼야를 이렇게 씩씩하게 말하는 작품이 반가웠다. 특히 '작전' 이라고 스스로 경계를 하면서도 내내 이끌려 들어가서 결국 진심을 만나고 난 뒤 나는 두뼘쯤 성장해 있는 것이고 그 힘으로 카톡을 미친듯이 해대는 엄마도 무시하고 탄천을 걸어서 집으로 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작은 실천이, 행동이 내 자신이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간 것 같아서 행복했다. 
6. 발끝을 올리고

왕따 이야기에서 은따 이야기로 다시 왕따가 되어가는 이야기 '책임감은 N분의 1로 나뉘어 희석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무거운 ㅊ죄책감으로 남지 않으니까. 작은 조각이 모여 거대한 무게를 이뤄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와 희희덕 거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떨리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역지사지가 되지 않기 때문이고 합리화를 잘 하는 군중심리가 위기를 위험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서다미는 홀로서기가 가능해질까?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군중으로 몰려다니다가 나를 찾고 나의 기준대로 선택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혼자 짐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난하게 무리지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나를 숨기기, 내 생각을 말하지 않기, 무조건 동조하기. 이런 무리 속에서 줄곧 생활해왔다가 혼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