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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19세의 나이로 음반 전체를 작곡하며, 재즈 트리오 구성으로 첫 데뷔 음반을 발표한 '박진영'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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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애들은 음악을 몰라도 너무 몰라!"
어쩌다 가끔 만나는 나이 많은 삼촌뻘 형들과 소주에 찌개 하나 놓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 레퍼토리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은혜로운 말씀.
"네가 뭘 아냐? 너 밥 딜런(Bob Dylan)말고 레온 러셀(Leon Russell) 제대로 들어봤냐? 야마시타 타츠로(53년생의 일본 싱어송라이터) 각 잡고 들어봤어? 너한텐 그냥 오자키 유타카(26세로 요절한 일본의 포크 가수)가 최고냐?"
이렇게 조금은 두서없는 공격이 들어올 때는 그냥 멋쩍어하며 웃는 게 최고다. 그리고는 한국 음악계 전성기 시절 '나미'의 음악이나 '이미자'의 목소리는 하루빨리 재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열을 올리거나, 진짜 흑인음악의 전성기였던 80년대를 되돌려 달라는 등의 성토가 쏟아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이럴 땐 마치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다. 대화는 그렇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가며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세대 간 인식의 단절은, 이념과 정치뿐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있구나 하고 새삼 감탄(?)하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아주 재미있는 연주자가 한 명 나타났다. 올해로 만 19세인 이 어린 친구는, 또래의 친구들이 아이돌 팝, 혹은 입시를 위한 음악에 몰입할 때 과감히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가 '재즈'에 열광했다 한다.
서울시 영재음악학교에서 클래식 피아노와 작곡과정을 수료한 후, '경향실용음악 콩쿠르' 기악부문 대상을 받은 후에도 그의 재즈 사랑은 변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과거보다 '자라섬 국제재즈 콩쿠르' 베스트 크리에이티비티(Best Creativity) 수상을 더 자랑스러워했고, 내년(2011년)에 미국 버클리 음대로 전액에 가까운 장학금을 받고 재즈를 배우러 간다는 사실에 더 들떠있었다.
요즘 '어린 애'치고는 정말 독특하다. 이력도 독특하고, 하는 음악도 독특하다. 만일 그런 친구라면 내가 느낀 음악의 세대 간 단절에 대한 답과 희망을 조금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의 첫 음반이 나오는 날이자, 나에겐 그 전날 록페스티벌의 여운과 피곤함이 남아있는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한 재즈클럽에서 재즈피아니스트 '박진영'을 만났다.
19세 피아니스트 박진영, '재즈'를 만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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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EBS <스페이스 공감>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박진영 군. |
ⓒ E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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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 끝자락에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연주한 새 음반이 나오며 데뷔했어요. 그것도 재즈 음반인데요, 기분이 어떤가요.
"기분이요. 글쎄요. 현재 저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장르가 아무래도 재즈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너무 단순한 이유이긴 한데, 그게 맞는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뭐 남들이 말하는 어린 나이에 재즈를 듣거나 연주를 했던 게 스스로 특이하다거나 독특하다고 의식해 본 적은 딱히 없어요. 전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에 충실한 거니까.(웃음)
하지만 또 계기라고 한다면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빼놓기 힘든 거 같아요. 아버지께서 예전부터 주로 들으시는 게 현대음악이나 재즈라서. 항상, 뭐랄까, 음악이 집에서 흘러나왔고 그걸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환경이라는 것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거 같긴 해요."
- 재즈 외에 즐겨 들었던 음악은 없었나요?
"아니오. 클래식도 아주 좋아하고, 클래식 외에는 예전 가요, 뭐 토이(Toy)나, 윤상, 김현식, 이소라. 그러고 보면 예전 <동아기획> 사단 뮤지션들을 무척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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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영 트리오'의 재즈 피아니스트 박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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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또래친구들은 그런 음악을 잘 듣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그런 음악을 찾아 듣는 친구도 없었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도 별로 없었죠. 그런 기회 자체가 없다보니까, 재즈 뮤지션들이나 <동아기획> 뮤지션들이 저에게 있어서는 '나만의 아이돌'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저에겐 당시 또래 친구들이 듣는 음악을 굳이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었어요.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게 있는데 그걸 주위환경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버린다거나 할 수는 없잖아요."
- 고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뒀어요. 역시 음악 때문인가요.
"음… 음악이 우선 가장 큰 이유겠죠. 저에게 그런 면에서 당시에 음악은 그만큼 소중했던 것 같아요.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데 어떻게 학업과 음악을 병행하느냐 하는 생각도 있었고, 또래 애들하고 약간 별난 구석이 있었는지 그때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하하.
또 입시에 목매는 일반 인문계 교과가 저에겐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고요. 근데 뭐랄까, 보편적인 학식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고민은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또 입시만을 위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것들을 강제적으로 배우기는 싫었고. 차라리 그럴 바에는 많은 것들이 좀 아쉽더라도 집에서 혼자 공부하고 음악을 친구삼아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죠."
- 클래식으로 처음 피아노를 쳤다고 하던데 재즈로 전향한 이유는.
"아. 클래식을 공부할 때 제가 가장 많이 동경했던 것은, 클래식 작곡가들이 스스로 곡을 만들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이었어요. 고전 클래식 음악가들을 보면 작곡가와 연주자의 구분이 없었잖아요. 자기가 작곡을 하고 자기가 연주를 하는 그게 구분이 없었는데, 현대 클래식에 와서는 그런 구분이 너무 명확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 두 개를 같이 가져갈 수 있는 음악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당시 저에게 유일한 게 재즈음악이었어요.
그리고 재즈음악이라는 게 대중들이 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안에 굉장히 다양한 장르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계보가 빌 에반스(Bill Evans)나 레니 트리스타노(Lennie Tristano)뿐만 아니라 더 올라가서 바흐나 쇼팽 같은 클래식 음악가들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 두 장르에 대한 확연한 구분보다는 좀 자연스럽게 이전됐다는 측면이 있어요."
- 새로운 도전인 재즈음악을 혼자하기 좀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조금…그렇죠. 그래서 처음엔 혼자 동네 실용음악학원도 알아보고 그러다가…근데 거기서는 제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진 않았어요. 물론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도 하시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재즈를 가르치는 곳은 많은데, 거기서는 정형화된 재즈나 입시를 위한 재즈 외에 다른 아름다운 음악에 관해서는 간과하기 쉽겠다는 인상을 조금 받았어요.
하라고 해서, 혹은 남들이 다 이렇게 연주하니까. 이를테면 남들이 정해준 스탠다드 연주나, 12마디 블루스를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음악적 형식에 대해서 반감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나도 이렇게 해야 하나 하면서 자꾸 눈치가 보이고. 왠지 즐겁게 연주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원은 곧 때려쳤고요.(웃음)
그 뒤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들으면서 피아노를 치고 하니까, 아무래도 클래식음악을 많이 참조하게 되고, 그 외에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연습도 하게 되고. 그리고 삽질도 많이 하게 되고. 하하. 그런데 막연하게 이러다 보면 언젠가 뭔가 되겠지 하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볼 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보면, 제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큰 확신이 있었어요."
다음 세대에게 재즈, 그리고 대중음악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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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발매된 박진영 트리오의 [Graceful Ri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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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10대들은 미국의 팝음악조차 낯설어하죠. 주위에 친구들은 주로 무슨 음악을 듣나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요?
"근데 사실 뭐 주변에 보면 아무래도 편중된 대중음악에 많이 치우쳐 있죠. 그리고 그들도 그걸 꽤나 즐기고요.
근데 이제 저같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나 흔히 마니아라는 불리는 리스너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런 편중된 음악에 만족을 못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음악이란 게 굳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소리가 된다면 그거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도 보고요."
- 그러면 흔히 말하는 인기가 있는, 즉 자본이 몰려있는 대중음악 작곡 쪽으로의 전향은 아예 생각을 하지 않나요?
"근데 솔직히 그건 알 수 없는 거 같아요. 막연하지만 전 지금 학습해야 될 게 너무 많아요. 그렇게 배워야 할 것에 포커스를 맞추다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에게 음악이란 것은 어느 특정된 장르에만 묶여 있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큰 의미니까요. 재즈 외에 다른 음악들도 많이 좋아하는지라, 대중음악 작곡에도 사실 관심이 많고 언젠가 한번쯤 꼭 해보고 싶어요."
- 음반을 들어봤어요. 독특해요. 지금 실음과 학생들이 연주하고 배우는 밥을 위시한 모던재즈와 같이 국내에서 흔히 듣던 스타일이 아니에요.
"음…뭐랄까 입시에 너무 몰입된 공부를 하지 않은 게 약간 도움이 됐다고도 생각해요. 그리고 사실 이번에 발표한 음반같은 경우에는, 최근 재즈씬에서 유행하는 진보적인 보이싱(voicing)이나 프레이징(phrasing). 혹은 변박 같은 거. 그런 거 자체에 신경을 쓰기 보다 제가 가진 텍스쳐(texture)나 작곡 스타일에 초점을 많이 맞췄어요.
예전부터 항상 거기에 맞춰서 음악공부를 했고 지금도 늘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다채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라이브 무대가 아니라 첫 스튜디오 녹음이다 보니 거기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약간 아쉬운 부분도 있긴 하죠. 그래도 불타오르는 라이브 무대와는 달리 조금 절제한다는 기분으로 연주를 했다는 측면에서 만족하는 부분도 있고 또 그래요. 하하.
스타일이 조금 독특한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곡을 쓰고 연주를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재즈 명곡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은 그 곡을 훌륭하게 해석을 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근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곡을 연주한 것이지 자기 음악은 아니잖아요.
근데 그렇게 다른 사람의 곡을 연주하다보면 그 곡에 따라 임프로바이징(improvising)하는 방식도 달라지는데, 다른 재즈밴드들과는 달리 제가 만든 곡에 직접 임프로바이징 하다 보니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스타일이란 연주에서 찾는 게 아니고, 곡을 직접 쓰는 데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천재? 남들에겐 생경한 아름다움을 접하고 표현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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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영 트리오'의 재즈 피아니스트 박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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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독학에 가까운 공부를 했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작곡실력이나 연주에서 상당한 두각을 보였어요. 거기다 10대다 보니 종종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있는데...
"하하. 근데 천재라는 거는, 제가 생각하는 천재는 남들이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는 사람을 천재라고 생각해요. 남들과는 달리 생경한 아름다움을 좀 더 접하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 차이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면, 저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그 정도차이 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 본인이 좋아하는, 혹은 롤모델인 재즈피아니스트가 있나요.
"아. 정말 너무 많은데. (한참 고민하다) 외국 피아니스트는 폴 블레이(Paul Bley). 국내에서는 계수정씨.
그리고 제가 재즈 피아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블루지(bluesy) 하냐 안하냐 인거 같아요. 제가 말하는 '블루지 하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블루스적인 패턴을 어떻게 운용하고 뭐 그런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한' 같은 것들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하는 연주자들이 '블루지 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생각나는 대로 막 얘기하면 베토벤, 쇼팽, 브람스, 멩겔베르그(Misha Mengelberg), 제프 백(Jeff Beck),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크쥐스토프 코메다(Krzysztof Komeda) 등등 이런 사람들은,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만큼 블루지하게 음악을 표현하는 분들이 없다고 생각해요."
- 지금 열거한 음악인들은 얼핏 듣기에도 장르가 굉장히 다른 분들인데.
"저는 장르나 음악적 경계를 초월해서 정말 자기 자신의 한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블루지하다고 생각해요. 뜬금없이 록 음악가나 클래식 음악가가 왜 나오나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심지어 이분들이 전부다 너무 훌륭한 블루스 음악가고 재즈 뮤지션이라고도 생각해요.
그건 외국 사람들이 우리 국악을 들으면 '이거 블루스 아냐?'하는 거랑 비슷한 거 같아요. 결국 들리는 소리에 관한 시각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음악가의 내면의 시각에 대한 얘기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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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4일 <클럽 에반스>에서 공연 중인 박진영, 베이스 정용도, 드럼에 김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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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같은 경우 국내에 '자라섬 페스티벌' 같은 축제가 있긴 하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 확실히 시장이 작다고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건 제 위치 때문에 조금 조심해서 이야기해야 될 것 같은데, 저는 우리나라 재즈음악은 상당히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재즈씬도 다른 장르의 음악처럼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자리를 잡지 않을까 생각해요. 단편적으로 밥 스타일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재즈가 나올수록 그만큼 체계도 잡힐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 박진영 군은 흔히 얘기하는 음악에 있어 '다음 세대'인데요. 지금 현대 대중음악 시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혹 바라는 점이 있다면.
"대중매체들이 한쪽에 편향된 음악을 소개하기보다는, 그 외에 다른 음악이 있다는 것을 일단 알아야 들을 수 있으니까, (다양한 음악 소개) 그게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미디어가 보도하는 음악들이라는 게, 한쪽에 편중되어 있다 보니까 대중들도 거기에 세뇌당한다는 기분도 들어요. 대중들이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을 왠지 원천부터 차단 당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우선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거 같아요.
앞으로는 좀 대중매체들이 더 다양하게 음악들을 소개하면, 어쩌면 그게 진짜 대중적인 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 그런 바라는 점을 더해서, 한국 대중음악에 10대 음악가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정한다면.
"와… 이게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요.(웃음) 제가 해야 될 역할은 우선 묵묵히 제 길을 가야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 같아요.
저를 포함한 선배님들이나 그렇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뮤지션 분들이 아니라면 그걸 누가 하겠냐는 생각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그런 점을 더 발전시켜 제가 하고 있는 음악을 충실하게 하는 것 외에는 (해야될 역할이)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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