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긴 고종과 친일파의 초상화
근대 이야기 2010/08/15 07:22 이충렬
보스는 세계여행 출발에 앞서 가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계획임을 밝혔다. 그래서 그는 1898년부터 2년 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티베트, 자바(인도네시아), 인도 등을 방문해서 왕족, 귀족, 평민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서울풍경>을 그린 후 <고종황제 초상>, <순종 초상>, <민상호 초상> 등 3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보스는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연유에 대해, "민상호의 초상화를 본 고종 황제가 자신의 초상화(어진 御眞)와 황태자의 초상화(예진 睿眞)를 그리라는 '황명'을 내렸다."라고 '자전적 편지'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민상호 초상>을 얼마나 잘 그렸기에 고종황제가 감탄을 하면서 '어용화사(御容畵師)'가 되라는 '황명'을 내린 것일까?
민상호(閔商鎬 1870∼1933)는 명성황후의 사촌동생으로 1882년 미국에 가서 1887년까지 6년간 교육을 받은 후,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보스가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민상호는 29살이었는데, 황실 인척이자 미국에서 교육받은 외교관으로서의 자부심이 가득 담긴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보스는 그의 '자전적 편지'에서 "민상호의 얼굴 생김이 한국 민족을 대표하는데 부족함이 없고, 학식이 높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그렸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보스가 파리 '만국박람회'의 전시회 출품을 염두에 두고 정성을 다해 그린 작품이고, 그래서 머리에 쓴 정자관을 비롯해 옅은 연두색이 감도는 한복 그리고 가슴에 두른 띠 등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하게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민상호 초상>은 민씨 가문 소장 작이 아니라 보스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2점을 그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민상호 초상>에 나타난 보스의 표현력을 보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보스가 영국 '왕립 초상화가 협회' 창립회원으로 유럽과 미국의 상류사회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리는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스는 1905년,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부분은 흰 색으로 쓴 '민상호'와 검은색으로 쓴 '휴벗 보스'라는 한글인데, 이 한글 이름은 보스가 직접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는 1905년 12월 17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서태후 초상>에 있는 한문을 자신이 직접 썼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붓질을 하는 초상화가이기 때문에 어려운 한문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한글도 직접 썼을 가능성이 많다.
휴버트 보스 <고종황제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199 x 92cm 1899년
황명을 받은 보스는 고종 황제의 초상화를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수 있도록 한 점 더 그릴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비록 '힘없는 나라' 조선이지만, 황제의 초상화를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 화가로서 '영광'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민족의 초상화를 종합해서 전시하려는 자신의 계획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스의 청원을 전달받은 고종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고종도 대한제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큰 규모의 '대한제국관'을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자신의 초상화가 전시되는 것이 득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게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스는 두 점의 <고종황제 초상화>를 그렸고, 지금 남아있는 초상화는 보스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남아있던 고종황제와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초상화는 왜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보스가 우리나라에 남기고 간 두 점의 초상화는,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의 예진(睿眞)을 봉안하는 덕수궁의 흠문각(欽文閣)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덕수궁 화재 때 흠문각이 전소되면서 보스가 그렸던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도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보스는 고종황제의 초상화만 한 점 더 그렸기 때문에, 순종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당시 보스가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그린 사실은 <고종실록>을 비롯해 황현의 <매천야록>,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 속편>, <황성신문> 등에 기록이 남아있었지만, 한 점 더 그렸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근대미술사학계에서는 당시 보스가 그렸던 두 점의 유화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길 속으로 사라졌던 <고종황제 초상화>가 1997년 겨울에 나타났으니, 근대미술사학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세로 2미터의 실제 크기 전신 초상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제나 왕의 초상화는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초상화는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이전의 고종 어진이나 사진의 배경에 있는 해와 달 그리고 산과 폭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일월오봉도)>도 보이지 않고, 옆과 뒷부분을 여백에 가깝게 처리했다.
보스는 이렇게 전신 크기의 초상화를 그린 이유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황명'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왜 앉아있는 모습의 초상화가 아니라 서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는지를 설명해주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소개 책자를 보면, 고종황제가 왜 서있는 모습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안내 포스터
'만국박람회' 책자에 소개된 대한제국
'만국박람회' 책자는 1900년 초에 발행되었지만, 소개된 고종황제와 황태자이던 순종의 사진은 당시 우편사정을 감안할 때 보스가 초상화를 그렸던 해인 1899년 말 경에 촬영했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당시 고종 황제는 서있는 모습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서있는 모습의 전신 초상화를 그리게 한 이유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고종황제는 왜 서있는 모습을 선호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대한제국의 설립과 고종황제가 원했던 황제의 위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고종 황제가 10만 프랑이라는 거금(프랑스 기록)을 들여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이유가, 대한제국의 실체를 세계 각국에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다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8개월 후인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취임했다. 고종이 황제에 즉위한 이유에 대해 주한 미국 공사관 1등 서기관 W. F. 샌즈는 "왕은 황제의 신하가 될 수 있으나 황제는 누구의 신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황제에 즉위하면 중국 일본 러시아 황제와 동등해질 것이라는 봉건적 이론에 근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1930년 미국에서 출판한 자신의 책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서 밝혔다. (78쪽)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이렇게 '대한제국'이 되었고, 고종 임금은 '광무 황제'에 취임했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외국인들은 극소수의 외교관뿐이었다. 외국 유력 언론에서 이런 사실을 보도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고종황제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대한제국과 황제의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서있는 모습이 앉아 있는 모습보다 위엄이 선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보스에게 서있는 모습을 그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부분도(작품 이미지에서 보이는 오른쪽 귀 옆의 얼룩은 고종황제의 흉터가 아니라, 작품 훼손 흔적이다.)
<고종황제 전신 초상화>에서 보스의 필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상반신이다. 고종황제가 입고 있는 곤룡포(袞龍袍)는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때 입던 시무복이기 때문에 역대 조선 임금의 초상화(어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왕들이 입었던 곤룡포는 붉은색이지만 고종이 입고 있는 곤룡포는 황색인데, 그 이유는 왕은 붉은 색을 입고 황제는 황색을 입기 때문이다.
가슴에 보이는 흉배에는 황제의 상징인 용과 대한제국의 상징인 태극무늬가 있다. 어깨에도 용이 있는데, 황제의 용과 왕의 용의 다른 부분은 발가락 숫자다. '황제의 용'에는 발가락이 다섯 개, '임금의 용'에는 4개다. 그래서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 백자에 보면 용의 발가락 숫자가 4개짜리가 많다.
고종 황제가 머리에 쓰고 있는 관(冠)은 익선관(翼善冠)으로, 곤룡포를 입을 때 쓴다. 익선관은 모(帽)가 턱이 진 2단으로 되었는데, 뒤쪽을 자세히 보면 매미 날개 모양의 장식(작은 뿔)이 달려있다. 복식연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왕이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처럼,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보스는 '자전적 편지'에서 "황제와 그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 슬픈 예감을 갖고 떠났다."라고 했다. 미국공관에 머물면서 당시 우리나라의 정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고종의 표정에서는 황제의 권위 대신 그늘과 우울함이 보인다.
보스의 '자전적 편지'의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이 초상화에 만족했고 황제는 선물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1899년 7월 12일 '황성신문'은 "몇 달 전에 미국 화사 보스씨가 미국 공사관에 왔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보스는 동양 여행을 하면서 여러 가지 풍속을 그려 내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할 계획이라더니, 다시 들리는 바로는 그가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그려 바치고 그 보상으로 1만원을 받고 일전에 떠나갔다더라." 는 기사를 실었으니, 보스가 밝힌 황제의 선물은 거금 1만원이었던 것이다.
당시 만원은 기와집 몇 채 값이었는데, 보스는 유럽과 미국에서 주문이 밀려들어 미국 대통령 영부인의 초상화도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고 큰소리치는 일류 화가였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사례는 아니었다.
고종황제 초상화가 포함된 보스의 전시회 소개가 실린 <뉴욕타임스> 1900년 2월 9일자
보스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티베트, 자바(인도네시아), 인도 등에서 그린 초상화를 갖고 직접 파리로 가지 않고 뉴욕으로 갔다. 파리로 가는 증기선이 뉴욕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4월 15일까지 시간이 충분했는지, 아시아에서 그린 작품과 그 이전에 꾸준하게 그렸던 작품을 갖고 '다양한 민족의 모습'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뉴욕 타임즈'에서 기사 검색을 하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후 일본에 강제로 합병될 때까지 13년 동안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기사가 3번 실렸는데, 이 기사가 그 중 첫 번째다. 고종이 황제에 취임한지 2년 4개월이 지났을 때, 초상화로 황제의 존재가 처음으로 미국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을 알리려는 고종의 의도는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파리 만국박람회 미국 회화관에 전시되지 않고, 매우 엉뚱한 곳에서 전시되었다. 당시 미국 회화관의 공식 카탈로그를 살펴보면, 회화, 드로잉, 삽화, 동판화, 건축, 조각 등의 분야로 나눠 전시되었는데, 출품 화가 명단에는 보스의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회화가 아닌 인종학적 자료로 분류되어 '사회관'에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미술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특별전시관 전시'는 사실이 아니다.
고종황제가 푸대접을 받은 건 파리박람회에서뿐 이 아니었다. 격동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는 무력했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서 나라를 지키려했던 노력도 실패했다.
결국 고종황제는 일본과 친일파 각료들의 강요에 의해 순종에게 황위를 넘겼고, 그 얼마 후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스가 대표적 한국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초상화를 그렸던 민상호는 친일에 앞장서며 남작이 되었다. 그래서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 초상화>와 <민상호 초상화>에는 슬프고 안타까운 근대의 모습이 한 자락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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