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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네

MB정부에게서 파시즘의 징후가 읽힌다

MB정부에게서 파시즘의 징후가 읽힌다
[영화로 읽는 세상 이야기 36] 순수의 전조, 파시즘에 관한 우화 <하얀 리본>
10.07.11 18:32 ㅣ최종 업데이트 10.07.11 18:32 박호열 (tkaenao)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완전한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 중 일부는 전해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이 어쩌면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명확하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흑백영화 <하얀 리본>은 늙은 교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내레이션은 독일의 한 마을에서 시작해,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로 비약합니다. 그 마을이 근대 독일 사회의 축소판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대체 그 마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1913년 영화 속 독일의 어느 마을. 이듬해인 1914년 6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합니다. 이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방이 유럽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으니,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입니다. 영화와 현실을 잇는 알레고리는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한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어떻게 1차 대전과 파시즘의 기원을 탐구하는 연결고리가 되는지 탁월하게 묘사해 나가면서 오늘의 한국사회를 비춰보는 거울이 됩니다.

 

그 마을에서 왜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걸까?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의사가 누군가 매어 놓은 줄에 걸려 넘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경찰이 수사를 하지만 오리무중. 이어 농부 펠더의 아내가 의문의 사고로 숨집니다. 추수감사절 날, 마을 영주인 남작의 양배추 밭이 작살납니다. 남작의 아들 지기는 바지가 벗겨져 거꾸로 매달린 채 볼기짝이 터져 선혈이 낭자한 상태로 발견됩니다.

 

  
마을의 주인인 남작의 영지가 한 밤중에 불에 타오른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도 밝혀지기 전에 농부 펠더는 목을 매 자살한다.
ⓒ (주)피터팬 픽쳐스
하얀 리본

얼마 뒤, 남작의 영지가 불에 타 오르고 이튿날 농부 펠더가 목을 매 자살한 채로 발견됩니다. 마을의 산파 바그너 부인의 지체장애 아들 카를리는 두 눈이 실명위기에 처할 정도로 처참하게 린치를 당합니다. 지기가 관리인 아들에게 피리를 뺏기지 않으려다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합니다. 그 와중에 급전이 당도합니다.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했다는…, 이윽고 희번덕거리는 눈빛들 속에 곧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마을을 휘감아 돕니다.

 

이렇게 영화는 성격이 다른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중첩시킵니다. 그와 함께 대체 범인이 누굴까 하는 의심에서, 왜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걸까하는 의문으로 관객의 눈을 이동시킵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록 명쾌하게 밝혀지는 건 없습니다. 권력과 계급과 세대와 폭력이 얽히고설킨 축약을 통해 마치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이, 숱한 의문부호를 관객의 몫으로 던져 놓습니다.

 

다만 영화는 세 가지 축의 '억압기제'는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마을의 주인인 남작과 목사와 의사입니다. 이 삼각지배체제의 숨 막히는 통제 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본능이 어떻게 표출되고, 악의와 위선 그리고 폭력을 통해 파시즘이 어떻게 잉태되고 발흥하는지를 알레고리 가득한 카메라는 근래에 보기 드문 정치사상적 성찰을 탐구해 갑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

 

마을 주민들은 남작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농들입니다. 그는 공동체의 법이자 최고 권력입니다. 남작의 오른 편에 서 있는 목사는 주민들의 영혼을 하느님과 남작에게로 인도하는 한편 그들의 일상을 감시합니다. 의사는 지식과 전문기술을 갖춘 신흥 엘리트로 부상하며 지배체제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렇게 마을의 억압기제는 삼각편대를 이루며 작동하고 있습니다.

 

남작은 곧 마을입니다. 루이 14세가 말한 것처럼 '남작이 곧 법'이요 진리입니다.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공권력을 불러 마을을 공포와 불신과 폭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남작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파시즘의 준동을 상징하는 기제로만 읽힐 뿐, 그 '징후'를 드러내는 이는 목사와 의사, 그리고 아이들입니다. 

 

  
저녁식사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시절 묶었던 하얀 리본을 완장처럼 찬 마르틴. 순수와 억압의 상징인 하얀 리본은 나치의 철십자 완장을 연상케 한다.
ⓒ (주)피터팬 픽쳐스
하얀 리본

목사는 가장 교활하고 지능적인 억압 기제로 꼽힙니다. 자신의 자식인 클라라와 마르틴이 저녁 시간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식구들 모두 밥을 굶기고 혹독하게 체벌을 가합니다. 그리곤 순수와 억압을 상징하는 '하얀 리본'을 머리와 팔에 묶습니다. 믿음이 회복되는 날 풀러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목사는 또 조숙한 아들 마르틴에게 끔찍한 거짓말로 자위행위 하는 것을 실토케 합니다. 마르틴이 눈물범벅인 채로 고백하자 밤마다 침대에 양 손을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해 놓고 자라고 합니다. 클라라가 교실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벽을 보고 세워 놓은 채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줘 그 자리에서 실신케 합니다.

 

순결과 정직을 빌미로 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목사는 폭력과 세뇌를 병행합니다. 그런 목사에게 있어서 '하얀 리본'은 엄격한 규율과 금기의 내면화이자 종교적 권위를 지탱해 주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이런 권위는 또 다른 폭력 앞에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목사의 억압에 극단적인 그러나 소리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는 클라라와 마르틴 등 아이들입니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걷는 마르틴을 발견한 교사에게 "신께 저를 데려갈 기회를 주었는데, 아직 저를 데려가지 않아 기쁘다"고 말합니다. 클라라는 목사가 애지중지 키우던 새의 머리를 가위로 찔러 죽인 뒤 십자가 모양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잉태한 결과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낳은 증오와 폭력

 

시대가 불온한 광기로 접어들면 욕망의 화신 또한 추악한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의사는 산파와 내연관계입니다. 둘의 관계가 의사 아내가 죽기 전부터인지, 카를리가 의사의 아들인지, 둘이 작당해 아내를 죽였는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의사는 산파에게 역겹고 토할 것 같다며 헤어지자고 합니다. 즐길 만큼 즐겼으니 지겨워진 것입니다. 대신 의사는 자신의 딸 안니를 더듬다 겁간하기에 이릅니다.  

 

영화는 힘의 논리에 기인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방종할 경우 그 끝이 어딘지를 의사를 통해 극명하게 들춰냅니다. 알레고리를 통해 의사의 욕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지배력에 있다는 것도 증언합니다. 또한 내연녀와 안니를 통해 각기 다른 방면에서 의사와 카를리에게 끔찍한 증오의 폭력이 가해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산파와 의사가 사라진 뒤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다. 평온을 되찾은 듯한 모습 뒤로 1차 대전의 포화와 파시즘의 대두라는 악마의 전주곡이 울린다.
ⓒ (주)피터팬 픽쳐스
하얀 리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산파와 종적을 알길 없는 의사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사건과 혐의를 떠넘기고 시치미를 뚝 뗍니다. 단 한 사람, 교사만이 클라라와 마르틴을 만나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돌변하며 야릇한 미소를 띨 뿐입니다.

 

<퍼니게임>과 <히든>등 전작들에서 개인과 가족의 파멸과 붕괴를 충격적 영상으로 그려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하얀 리본>에서 그 파멸의 대상을 아이들에서 시작해 사회로까지 확장해 나갑니다. 개인과 가족에게 가해진 폭력이 어떻게 사회로 확장되고 한층 견고해진 폭력과 억압이 다시금 개인과 가족으로 순환되면서 파시즘이 대두하는지를 다양한 색감의 알레고리로 직조해 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아이들은 20년 뒤 어떤 모습일까

 

영화는 억압과 통제가 켜켜이 쌓일 경우 그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 성찰케 합니다. 폭력으로 통제되는 획일화된 집단속에서 '폭력의 잉태'가 어떻게 '폭력의 역류'로 준동하는지를 영화는 아이들을 통해 예시해 줍니다. 영화의 부제가 '독일 아이들의 이야기'이듯이 그 모습은 클라라와 마르틴으로 함축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폭력과 위선과 욕망과 적대를 보고 느끼며 체화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소통과 교감 속에 사건을 도모합니다. 그 대상은 남작 아들이나 의사 같은 강자이기도 하고 카를리처럼 약자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억압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되갚는다는 점입니다. 파시즘의 맹아는 이렇게 싹트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에서 패한 지 20년 뒤, 철십자 완장을 차고 게르만 혈통의 순수를 부르짖으며 인종 학살의 파시즘에 앞장서는 청년들은 바로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화 속 아이들 못지않게 이중 삼중의 억압과 분노와 무기력에 찌든 채 어른들의 폭력과 통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사회의 아이들은 20년 뒤 어떤 모습일까요? 더군다나 4대강 독선은 여전하고, 천안함 사건으로 준전시상태라면서 고속단정타고 관광이나 하고, 고문과 구타와 민간인 사찰이 부활하는 갈등과 적의의 시대에, 이명박 정부의 '불도저식' 억압과 통제의 기제가 한국사회의 저류를 관통하며 파시즘의 도래를 경고하는 상황에서 <하얀 리본>이 던지는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만 오락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다, 상영관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세계 대전과 파시즘의 대두를 낳은 근대 유럽의 억압과 폭력의 기제를 성찰하는데 있어 최고의 영상 텍스트로 꼽히는 만큼, 파시즘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시간과 발품을 팔아 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