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이 이상하다. 글자들이 마구 흔들리더니 복사해서 갈무리를 해둔 것도 역시 글자들 떨림이 있어서 결국 삭제를 하고 말았다. 되살리지 못하고 사라진 글자들. 아깝다. 반시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 것인데. 다시 쓰기 싫어진다.
5쇄 인쇄란다. '귀신 고래' '엄마의 바다'에 이어 세 번째 읽는 것이다. 누구는 다작하는 작가가 아니라서 작품이 여물다고 칭찬을 늘어지게 해놓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과작이라고 다 작품성이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위 두 편은 같은 해에 출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작품을 동시에 썼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귀신고래'를 읽고 나서 '엄마의 바다'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너무 수준이 들쭉날쭉 이구나 하는 점이다.
이 작품은 표지 제목에 이렇게 쓰여 있다. '국내 최초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창작인권동화' 이런 것이 얼마나 작품성을 보장해주는 것인지 싶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상술과 어울어지면서 매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국내 최초 이러면 굉장한 작품으로 보이나? 더구나 창작인권동화라는 이름이 너무도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 작품성이 보장이나 되고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작가는 이상하게 삽화 그림이 따로 노는 것 같다. 지미의 전체적인 모습도 마찬가지고, 작품의 어떤 의미로 삽화가 들어가 있는지 모호한 구석이 여럿이다. 특히 홍이 삼촌 집을 그림으로 그렇게 그려내고 나니 글로 서술되어서 느껴지는 분위기하고 사뭇 달랐다. 너무 밝고 환하고 서술에서 느껴지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왜 그리 삽화를 잘 활용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세 번째 책을 읽고 나니 확연해진다. 편집자의 능력 문제일까? 정말 아무런 삽화도 없었으면 더 나을 것 같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삽화가 텍스트의 분위기를 죽여주고 있어서다.
엄마의 바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인 지미는 정체불명이다. 몇 살인지 설정이 되어 있지 않다. 아이들이 인터넷에 호소를 했다는 것으로 미뤄보면 6학년 쯤 되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되어지고 있는 부분에서 쓰이는 어휘들은 그 이상을 의미해서 뭔가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주인공에 대한 설정을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작품의 폭을 몇 학년용으로 한정을 지을까봐 보다 폭 넓은 선택을 위한 것일까? 왜 작품마다 이렇게 설정조차 못하면서 진행을 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몰라서 못할 리는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갸우뚱해지는 부분이다. 어떤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말인지. 설정 자체에서 오는 무리수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판단 착오인 것 같다. 도리어 확실한 설정을 통해서 그 아이 전형성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보여 진다. 그래서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지미의 말이나 행동이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부분으로 남아서 아쉽다.
더구나 아버지 ‘히론 페루키’조차 국적 불명이다. 국적 불명은 그렇다 치고 그가 일상적인 대화도 하지 못하는 어눌한 사람으로 그려놓은 것은 정말 비현실적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삼년만 지나도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다면 십년 넘게 살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더듬거리게 그린 까닭이 뭘까. 그러다 보니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 피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 단지 옷자락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외국인노동자들의 노동현장의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모두 비웃고 천시하는 노동자들만 있을까. 페루키에게는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없고,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외국인 노동자는 지미 아빠 하나만 그려놓은 것도 농밀하지 못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하나 걸리는 것은 선생들의 모습이다. 남선생은 홍이 삼촌 친구로 나오면서 지미가 엄마를 찾아 가출할 때까지 어떠한 손길도 그려지고 있지 않다. 그런 반면 전학 와서 여선생은 저런 담임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공장 문 앞에서 시위하기, 홍이 삼촌네를 찾아오기, 지미네 집 가정방문, 수니의 장례식 참석까지 현실에서는 거의 보기 드문 모습을 정의의 화신처럼 그려내고 있다. 그런 여선생의 모습에서 진정성보다는 너무도 의도적인 작가의 작위성 때문에 작품성을 갉아먹고 있다. 사실적인 작품성으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너무 낭만적인 여선생의 개입으로 해결구조를 이끌어 내는 것은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지.
제목은 외로운 지미이지만 작품이 진행될수록 행운아 지미로 느껴진다. 따뜻한 주변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고, 엄마 아빠가 있고, 정의로운 담임이 있고, 따스한 짝꿍 자연이가 있으며, 수녀님과 원장님 더불어 홍이 삼촌과 현우와 형들이 있지 않은가. 이만큼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가 외국인노동자 자녀가 아니라고 해도 받기 힘들지 않을까. 운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기도 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해결이 되길 바라는 바람이 너무 컸다. 외로운 지미는 단지 학교 아이들의 놀림이나 동네 사람들의 빈정거림 속에서 외로웠을 뿐이고, 할머니랑 살면서 엄마가 그리웠을 뿐이지 그것이 정말 외로운 거였을까. 주위 사람들 배치로 인해 외롭다는 설정의 설득력이 없어지고 말았다. 모두 너무도 따뜻한 이웃들이다.
그럼에도 지마가 엄마를 찾아서 떠나는 결단이나 이주 불법 노동자로서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이나 지미가 엄마 대신 1인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당당함은 자연스러우면서 전체적으로 서사를 무리 없이 이끌어 나간 부분의 긴밀성을 갖고 있어서 긴장감을 주고 있다. 화자의 시점이 지미의 눈을 통해서 보다가 각자 주인공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여러 화자들의 시점으로 인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도 미덕이다. ‘공동체로 살아가느냐고’고 묻는 여선생에게 홍이 삼촌은 ‘그런 것은 모르고 그냥 같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답변이 작품 곳곳에서 스며나고 있는 점은 그나마 작품을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매력으로 작용했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하자면 ‘창작인권동화’라는 측면이 부각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악덕 사장도 쉽게 화해를 한다? 이런 부분과 지미의 성금 전달 부분 등도 계속 걸리는 인권문제 부분이다. 외국 노동자들의 인권을 제대로 그리기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린이문학, 청소년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손/김일광/유동훈 그림/낮은산/2006 (0) | 2008.08.29 |
---|---|
말더듬이 원식이/ 김일광/우리교육/1995 (0) | 2008.08.29 |
귀신고래/김일광 글, 장호 그림/내인생의책/2008 (0) | 2008.08.25 |
앵무새 열마리 (0) | 2008.08.22 |
춘천여름 (0) | 2008.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