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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위하여

꽃다지 후원주점

프레시안

'희망의 노래 꽃다지'가 계속 노래하고 희망이 될 수 있도록
[기고] 30주년 맞이하는 꽃다지 후원주점 열어

김중미 작가  |  2023-03-15 06:06:06

단칸 셋방에 살던 어린 시절, 저녁 밥을 먹고 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 아버지는 ‘세월이 가면’, ‘하얀 조가비’, ‘봄이 오는 길’, ‘얼굴’, ‘그리운 사람끼리’ 같은 박인희의 노래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에게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르게 하셨다. 그러고는 두 분이 ‘봄처녀’, ‘님이 오시는지’, ‘고향의 노래’ 같은 가곡이나 ‘Simon & Garfunkel’ 노래를 듀엣으로 불러 주셨다. 때로는 소니 녹음기에 그 노래를 녹음하기도 했다. 우리가 부모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던 시간이, 훗날 우리가 거센 바람을 견디는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1988년 공부방을 시작하고 나서 공부방 아이들에게도 그런 경험을 나눠주고 싶었다. 아쉽게도 어머니 아버지의 소질은 이어받지 못해 노래는 잘하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 즐겨 불렀던 동요, 해바라기나 김민기의 포크 음악 중에서 좋은 노래를 골라 가르쳤다. 마침 ‘노래마을’의 노래가 발매된 뒤여서 ‘노래마을’의 노래도 종종 불렀다.

공부방을 연 1988년은 울산 지역에서 시작한 노동자 대투쟁이 인천까지 올라 와 있었다. 공부방에 자녀들을 보내던 보호자들도 일터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어머니들이 취업해 있는 봉제공장, 대기업의 파견근무 현장에는 노동조합, 노동인권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1990년 서강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여성노동자대회에 부모회 임원들과 함께 갔다. 그 대회가 어머니들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대회에서 배워 온 ‘참사랑’과 ‘희망의 노래’를 여성노동자대회에 가지 않았던 부모님들까지 부를 정도로 유행이 되었던 기억은 선명하다. 공부방 부모님들이 그 노래들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몇 년 뒤 공부방 정기 공연에서 어머니 아버지들이 ‘참사랑’과 ‘희망의 노래’를 부르셨다.

1990년부터 시작한 ‘기차길옆공부방’의 정기 공연 ‘우리 아이들의 나라는’의 꽃은 노래패였다. 그런데 해마다 노래를 고르는 게 숙제였다. 다행히 그때 ‘노래 찾는 사람들’이나 ‘노래마을’, ‘노동자노래단’의 노래들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때라 좋은 노래를 골라 ‘노래마을’과 ‘노동자노래단’에 무작정 연락해 악보를 구하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희망의 노래 꽃다지’를 만난 것은 1993년 예술극장 한마당에서였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는 공연을 겨우 세 살 된 큰딸을 데리고 갔었다. 음반으로만 듣던 노래를 공연을 통해 처음 만나 들떴다. 다행히 세 살 딸도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특하게도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공부방에 늘 듣던 노래여서였는지 흥얼흥얼 따라 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 태어난 공동체 아이들은 모두 꽃다지 노래가 동요만큼이나 가까운 노래였다.



ⓒ꽃다지 페이스북 갈무리
우리가 ‘꽃사람’(꽃다지 후원회원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약칭)에 가입하게 된 것은 1996년인가, 1997년에 인천 서구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꽃다지 콘서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서였다. 그 공연을 보며 꽃다지가 투쟁 현장만이 아니라 단독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이끌어 갈 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알았다.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노래의 힘으로 서로 모이게 하고, 손을 잡게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계기였다. 그즈음 우리는 대학생 때 ‘기차길옆공부방’ 자원교사로 시작한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문화공동체를 이루어가던 ‘희망의 노래 꽃다지’에게 동질감, 동료 의식을 느끼는 게 당연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공부방과 직장생활을 함께 하며 바쁜 와중에도 꽃다지 공연을 갔다. 때로는 돌밖에 안 된 아이를 업고, 때로는 만삭의 몸으로 공연장에 갔다. 공동체의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고 유치원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부모들이 공부방과 지역 문제로 긴 회의를 할 때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딸이 동생들을 돌봤다.

그러면 큰딸은 노동자 문화단에서 만든 걸로 기억하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민중가요와 율동을 따라 했다. 그 비디오 테이프를 얼마나 보고 또 봤는지 세 살부터 여덟 살까지의 아이들이 ‘바위처럼’ 노래와 율동을 완벽하게 따라했다. 그래서 결국 어느 핸가 정기공연 때는 ‘바위처럼’ 율동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했다. 어린 아이들과 꽃다지 공연을 다녀오면, 자기들끼리 모이면 몇 날 며칠을 각자 파리채나 주걱을 들고(마이크 대용) 꽃다지 이모들 흉내를 냈다. 특히 우리 둘째 딸은 ‘불나비’를 부르며 헤드뱅잉까지 했다. 어쩌다 멀리 여행을 갈 때면 차 안에서 꽃다지 노래 테이프를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시 청년지원센터에서 일하다 지금은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는 Y는 네 살 때 뜻대로 안 되는 발음으로 ‘청호동 할아버지’를 따라부르려 애를 써 이모삼촌들의 웃음 버튼이 되기도 했다.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불렀던 꽃다지 노래들은 셀 수가 없다. 얼핏 떠오르는 것만 꼽아보아도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바위처럼’ ‘내일이 오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넝쿨을 위하여’ ‘노래만큼 좋은 세상’ ‘아직과 이미 사이’ ‘희망’ ‘일어나길 기다려’ ‘반격’ ‘주문’ ‘손을 잡아야 해.’ 등등.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는 정기공연 때마다 마지막으로 상영하는 공연 메이킹영상의 주제가가 되어서, 지금도 어디서든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를 들으면 코끝이 시큰해져 온다.

2000년 공연에서는 1999년에 나왔던 꽃다지 3집의 타이틀곡 ‘진주’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당시 고3이던 J가 그 노래를 연습할 때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몇 번이나 뛰쳐나갔다. J가 노래를 부르다 뛰쳐나가면, H가 붉어진 눈시울로 끝까지 노래를 마쳤다. 공부방 초중고등학생부터 이모삼촌들은, J가 감정을 추스르고 공부방을 돌아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가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지금은 돌봄 교사로 일하는 J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가 되었고, 그 6학년 아들은 지금 ‘기차길옆작은학교’의 인형극패다. 애석하게도 엄마의 노래 소질은 물려 받지 않았지만, 이모의 인형극 피를 물려받은 것 같다. 두 아이의 학부모가 된 H는 전업주부에서 다시 사회복지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도 진주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슴이 아파 와 상처를 생각해요/깊이 박힌 가시와 그 아픔을 느껴요/숱한 밤 깨어 홀로인 날 많았죠/이 눈물로 감싸면 진주가 되나요/고개를 떨군 채 힘 없이 걷는 그대/상처가 있나요/아픔을 느끼나요/나처럼 뒤척이며/눈물로 감싸나요/괜찮아요 세상은 바다/우린 상처 입고/그 아픔으로 진주를 키우죠/누구나 가슴에/영롱한 진주를 키우죠.......

당시 고등학생이던 노래패 아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했던 ‘진주’는 우리 아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던 노래였다.

2001년에 나온 ‘반격’ 앨범은, 아이엠에프 이후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더 옭아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지쳐 있을 때 나왔다. 아이엠에프 이후 이어진 구조조정은 내 이웃들과 우리 아이들의 삶은 더 어렵게 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화자찬하는 이들이 주위에 넘쳐났다. 그때 느낀 회의감과 답답함을 뚫어 준 것이 ‘반격’앨범이었다. 2001년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반격’ 콘서트를 보고 나오면서 우리도 우리가 선 자리에서 ‘반격’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반격은 그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낮은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절망하고 좌절한 이들 곁에 있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해 ‘기차길옆공부방’의 정기공연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인형극 배경음악으로 ‘반격’과 ‘주문’을 넣었다.


ⓒ꽃다지 페이스북 갈무리
‘희망의 노래 꽃다지’와 ‘기차길옆공부방’이 바라보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때때로 서로 손을 잡고 함께 걸을 수 있었었다. ‘꽃사람’이 되고, 꽃다지 노래들을 공부방 공연에서 아이들이 부르게 되면서 우리는 좀 더 가까워졌다. 꽃다지 이모삼촌들은 바쁜 일정에도 짬을 내 공연을 앞둔 공부방을 찾아와 아이들의 노래 지도를 맡아주었다. 또 공연 당일 음향을 지원해주고,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또 공부방 노래패가 꽃다지 공연에 초대되어 함께 노래를 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어느새 공부방 아이들에게 꽃다지 이모삼촌들도 가족이 되었다. ‘평화바람’의 문정현 신부님과 이모삼촌들이 그런 것처럼. 집회에 갔다가 꽃다지 이모 삼촌들을 보면 아이들은 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무대에 오른 꽃다지 이모삼촌들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아했다. 그때 꽃다지 이모삼촌들과 함께 했던 아이들은 이제는 하자센터, 학교,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직장인이 된 아이들은 대학생인 후배들로부터 대학교 학생회 이야기를 들으며 한숨을 짓는다.

“얘들아, 대학에 학생회가 없다는 건 너희가 대학의 주체가 아니라 그냥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거야.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지? 그럼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아.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우리 같은 애들한테 말해. ‘그럼 수고해 주세요.’ 그러면서 성과급이나 인금인상을 알아서 해주길 바라지.” 때로는 공부방 때문에 쉽게 사는 길보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사는 게 고달프다고 투덜거리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살아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희망의 노래 꽃다지’와 ‘기차길옆작은학교’가 뿌린 씨앗인지 모르겠다.

2011년 꽃다지 4집 ‘노래의 꿈’이 나왔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코가 시큰했다.

나는 누군가의 가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나서/아무도 날 찾지 않을 때까지 살다 가지/내겐 작은 꿈이 있어/그대 여린 가슴에 들어가/그대 지치고 외로울 때/위로가 되려 해

때론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대 행복할 때/때론 그 사랑이 너무 아파 눈물질 때/

때론 지난 세월이 그리워 그대 한숨 질 때/그렇게 난 언제라도 그대와 함께하려네

한땐 나와 나의 동료들은/거친 세상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의 분노가 되고 희망이 되어/

거리에서 온 땅으로 그들과 함께했지/그땐 그대들과 난 아름다웠어/비록 미친 세월에

묻혀 사라진다 해도/다시 한 번 그대 가슴을 펴고 불러준다면/끝까지 함께할 테요......

그때는 용산 남일당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때였고,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우리의 싸움이 과거가 되는 것을, 여전히 힘든 노동자와 빈민, 장애인과 여성의 삶의 가려지는 세상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아이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아이들 곁에서 쉽게 절망, 좌절, 체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 노래가 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2013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희망지킴이들이 ‘H-20000 프로젝트’로 완성된 차를 ‘꽃다지’에 기증할 때 그 어느 때보다 기뻤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기차길옆작은학교 아이들 역시 신났다. 그 행사에 우리 아이들도 참가해 춘천인형극제에 나가 최우수상으로 받은 상금을 ‘평화바람’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삼촌들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그것이 희망이라고 믿었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연대의 힘을 배우고 느꼈다.

그 이후, 2014년 초여름 <섬과 섬을 잇다> 출간기념 북 콘서트에서 꽃다지를 만났을 때, 2016년 촛불집회에서 만났을 때 우리가 여전히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게 반갑고 힘이 되었다.

2020년에 찾아온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충격이었다. 우리는 30년 동안 함께 하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말해 왔는데, 정부는 서로 멀리하고 거리를 두라고 했다. 그래야 산다고 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그 거리두기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를 ‘각자도생’ 사회로 내몰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4년 전보다 더 위태로운 사회를 살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희망의 노래 꽃다지’도 우리 ‘기차길옆작은학교’도 더 함께 하는 삶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지난 3년을 힘겹게 버틴 이유는, 우리가 다시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애써 2023년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그때 ‘희망의 노래 꽃다지’가 ‘일일주점’을 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서글펐다. 우리 살기 바빠서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반성도 했다. 그러나 ‘희망의 노래’를 포기하지 않은 꽃다지에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꽃다지가 노래한 세상, 우리의 손에 잡힐 듯했던 희망은 아직 먼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절망하지 않는다. 35년 가까이 꽃다지가 뿌린 노래의 씨앗은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싹으로 돋아났다. 더러는 여러해살이로 벌써 여러 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또 다른 씨앗을 퍼트렸지만, 아직 어린싹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씨앗은 나무로 자라 그늘을 만들 만큼 자랐을 것이다. 이제 꽃다지가 뿌린 노래가 숲을 이루도록 단비와 거름을 준비해주어야 할 때다. 30년이 넘도록 투쟁 현장, 낮은 자리, 그늘진 자리까지 희망의 노래가 가닿게 애써왔던 꽃다지가 좀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꽃을 피우도록 우리가 함께 손을 잡으면 좋겠다.

노래는 밥을 먹여주지 않지만, 어떤 좌절과 슬픔에도 다시 일어날 마음의 힘이 된다. 가난한 우리 집에서 노래가 우리를 단단히 해주었던 것처럼 ‘희망의 노래 꽃다지’가 노동자, 빈민, 여성, 청소년과 청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약자들에게 희망과 힘이 될 것이다.


ⓒ꽃다지 페이스북 갈무리
김중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