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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세요, 새책을 소개해요

이혜란 작가 - 뒷집 준범이, 나무의 시간

우리 가족입니다. 예전에 읽은 책이었다. 서가 어느 귀퉁이에 있을텐데 찾지를 못해서 두 권만 먼저 보았다. 뒷집 준범이도 예전에 본 책이다. 다시 보니 아이들 글씨처럼 텍스트가 삐뚤빼뚤한 것이 더 정감이 가고,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아서 일단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작가에게 고마운 것은 할머니와 사는 준범이를 아이들이 발견하고 나서지 못하는 아이에게 “준범아, 노올자” 라는 글자가 아주 크게 쓰이면서 친구들이 준범이네 단칸 방으로 우르르 밀려들어오는 장면에서 심쿵하고, 이웃집 아이들도 내 아이들처럼 받아들이는 강희 엄마의 짜짱면 담긴 쟁반과 반 이상 깊숙이 숙인 상체가 어는 것보다 상징적이다. 저렇게 융숭한 마음으로 똑같이 다르지 않게 대해주는 어른이 있어서 동네 아이들은 모두를 함께 다 같이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부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작가는 회고를 통해서 옛날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동네에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살이같이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말이다. 연필 하나로 칙칙한 느낌을 주는 앞표지의 준범이네 집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허와 쓸쓸함이 빌딩에 가려진 어둠과 그늘까지 고스란히 지금의 사정을 보여주는 반면 뒤 표지는 신흥반점을 중심으로 아이와 할머니와 동네 아이들이 모두 나와서 함께 있는 모습으로 빌딩의 어둠도 쓸쓸함도 보이지 않고 흐려지고 환해지면서 아주 밝은 분위기이다.

준범이네 단칸방도 내내 어둡다가 아이들이 놀러 와서 점차 환하게 밝게 변화는 배경으로 준범이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아이들이 친구로 받아들이고 함께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든든한 백이 어디있을까. 준범이의 마음이 이처럼 밝아질 수 있었던 것은 동네 어른들의 태도와 아이들의 마음이 함께 어우러진 까닭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하고 담담하고 호들갑 떠는 것 하나 없어도 책을 덮고 나면 울림이 남는 책, 그게 바로 좋은 책이다.

그에 비해 최근에 쓴 작품인 <<나무의 시간>>은 나무 한 그루가 큰 나무가 되기까지 변화를 보여주면서 나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다 보니 또 다른 봄의 시간이 오래 흘렀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불쑥 큰나무가 되었다면서 급하게 진행이 되어 아주 어색하였다. 즉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나무의 시간이 성장과 환경을 탓하지 않고 감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나무는 자란다 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림으로 충분히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가지로 있었을텐데 모두 생략이 되니 어느날 뜬금없이 거대한 나무로 변신해 있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인과성도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가가 나무의 시간에 느낀 울림을 주고자 노력했으나 잘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그런 급격한 건너뛰기에 의한 단절이라는 생각이다. 작가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발전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늘 책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공감이 가게 하려면 좀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어린이 독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나무가 거대하다든가, 눈 덮은 나뭇가지가 예쁘다는 등의 시각적 이미지만 이야기 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왜냐면 작가의 생각이 그림으로 잘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세월이 흐르면 나무는 자란다 라는 지극한 명제에 이의를 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나무의 자람이 묵묵히 견디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어도 말이다. 식물이니까 당연히 견딜 수 밖에 없는데 어린 독자들에게 묵묵히 견디고 이겨내라는 큰 나무가 될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묵채색화를 써서 번짐 효과가 아름답지만 메시지 전달이라는 맥락과 연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