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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네

이안 보스트리지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를 비롯하여 걸출한 작곡가들을 배출하며 19세기 독일 리트의 확고한 전통을 세운 이래, 리트에 있어서는 199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독일 성악가들의 굳건한 영역을 범접하기는 힘들었다. 더구나 가히 독일 리트의 교과서라 할 만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헤르만 프라이, 프리츠 분덜리히, 페터 슈라이어 등 대가수들의 등장은 더욱 확고한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피터 피어스 등이 70년대에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을 녹음하며 독일 리트에 관심을 보였지만 전통과는 거리가 먼 색다른 해석으로 비추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본격적인 글로벌 시대가 시작되면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독일 리트의 확고한 전통의 아성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미권에서 빼어난 신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독일 리트는 더 이상 독일어권 계통 성악가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 중 90년대 음반사의 다양한 대형 기획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하이페리온의 슈베르트 가곡 전곡 녹음 프로젝트에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노래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이안 보스트리지는 독일 가곡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연 성악가로 평가되고 있다.

호리호리한 키에 유약해 보이는 청년, 어쩌면 슈베르트의 가곡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의 보스트리지는 첫 음반부터 타고난 미성에 풍부한 감성을 실어 좀더 사실적인 표현으로 평론가들의 절찬을 받았다. 더구나 각 음반마다 최고의 슈베르트 가수들을 섭외하여 녹음한 그레이엄 존슨의 의욕적인 기획에서 첫 연가곡집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있던 만큼 보스트리지의 등장은 큰 화제를 낳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방대한 기획에 이제 나이가 들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피셔 디스카우가 뮐러의 원작시에서 슈베르트가 노래로 작곡하지 않았던 6개의 시를 낭송하여 보스트리지의 이 데뷔 음반에 대한 권위를 확고히 해주었다. 결국 이 음반은 1996년 그라모폰 어워드에서 독창 부문상을 수상하였으며, 지금까지도 디지털 시대에 녹음된 동명의 연가곡집 가운데 가장 기념비가 될만한 녹음으로 남아 있다.

(월간 CODA Classic 2007년 8월호 발췌)

 

 

프로필_profile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Ian Bostridge | Tenor

1964년 12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난 보스트리지는 웨스트민스터 학교와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였고, 1990년 옥스퍼드에서‘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영국 민중 사회에 마녀들이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본격적인 성악가로 활동한 것은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듬해로, 연방정부 음악협회에서 개최하는 영 콘서트 아티스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불과 2년 후인 1993년 보스트리지는 위그모어홀의 퍼셀홀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노래하며 화려한 리트 가수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94년 알데버그 페스티벌, 1996년 리옹을 비롯하여, 쾰른, 런던,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함과 동시에 콜린 데이비스, 로스트로포비치, 찰스 매커라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스코티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양한 콘서트에서 노래하였다.

그의 오페라 데뷔는 1994년 브리튼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의 라이샌더 역으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이 역할로 출연하였고, 1996년에는 그의 첫 타미노를 영국 국립 오페라에서 노래하여 영국 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1997년에는 데보라 워너의 새로운 프로덕션에 의한 ‘나사의 회전’에서 인상적인 퀸트를 연기하였으며, 1999년부터는 차츰 레퍼토리를 넓혀가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의 바섹, 그리고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에서의 네로를 뮌헨 페스티벌에서 선보였다. 최근에는 브리튼의 최후의 대작 ‘베니스에서 죽다’의 에센바흐 역을 맡아 중견에 들어선 그의 가창력과 연기를 과시하였다.

무대에서의 활동보다 더욱 화려한 디스코그래피 역시 크게 리트와 오페라, 그리고 종교음악으로 나눌 수 있는데, 리트에선 아직까지 슈베르트의 가곡들이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이페리온에서의 성공적인 녹음 이후 그는 EMI에서 줄리어스 드레이크와 두 개의 슈베르트 가곡 음반을 녹음하였고,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가 진행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가곡 녹음에서도 훌륭한 가창을 들려주었다. 또한 EMI에서 새롭게 시작된 슈베르트 연가곡 녹음에선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미츠코 우치다와 재녹음하였으며, ‘겨울 나그네’는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와 호흡을 함께 하여 이제 ‘백조의 노래’만을 남겨 두고 있다. 슈베르트 이외에도 인상적인 슈만의 ‘시인의 사랑’, 볼프 가곡집(EMI) 등이 있으며, 독일 작곡가 이외에는 벤자민 브리튼의 가곡 녹음에 주로 힘을 쏟았다. 그 중에서도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녹음한 ‘세레나데’와 ‘녹턴’은 피터 피어스의 레퍼런스를 뛰어넘는 명연으로 손꼽히고 있다.

종교음악 분야에선 헤레베게의 ‘마태 수난곡’ 신 녹음에서의 복음사가(HM)가 가장 인상적이며, 파비오 비온디와 녹음한 바흐의 칸타타와 아리아집(Virgin) 역시 보스트리지의 지적인 가창이 빛을 발한 연주이다.

오페라 분야에서도 몬테베르디로부터 스트라빈스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로 자신의 영역을 서서히 넓혀가고 있다. 최근 들어 몬테베르디 오페라의 붐을 타고 녹음된 ‘오르페오’(Virgin)는 엠마누엘 하임의 신선한 해석과 더불어 보스트리지의 감성적인 가창이 화제를 모았고, 역시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작곡가 브리튼의 ‘나사의 회전’(Virgin)에서의 퀸트 역시 복잡한 심리극임에도 불구하고 연극적으로도 완벽한 가창을 들려주었다.

 

 

피아노 줄리어스 드레이크 Julius Drake

 “줄리어스는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어떤 감정과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지 매우 빨리 감지해 내죠. 10년이 넘도록 함께 연주하면서 줄리어스와 나는 우리 만의 말없는 언어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연주를 할 때면 나는 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  이안 보스트리지

영국 런던 출신의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드레이크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반주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이안 보스트리지와의 10여 년간의 파트너쉽을 통하여 수많은 공연과 음반 작업을 함께 해왔을 뿐 아니라, 빅토리아 드 로스 앙헬레스, 토마스 알렌 경, 올라프 베어, 바바라 보니, 제럴드 핀리, 질 고메즈, 마티아스 괴르네, 안젤리카 키르슐레거, 에디트 마티스, 그리고 토마스 크바슈토프 등의 정상급 성악가들과 크리스티안 알텐 부르커, 나탈리 클레인, 로버트 코헨, 마이클 콜린스, 나콜라스 다니엘, 브렛 딘, 첸 할레비, 스티븐 이설리스, 헨닝 크래그루드, 리차드 왓킨스 등 유명 독주자들과 함께 연주하고 있다.

그는 샨도스 레이블로 Hugues Cuenod와 함께 프랑스 가곡집을 발매하였으며, 버진(Virgin) 레이블로 나콜라스 다니엘과, 드렉 리 레긴과 영국 가곡집을 잇섿트라(Etcetera) 레이블로, 소피 데인먼과 슈만 가곡집을 EMI 레이블로 발매하는 등 음반 부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특히 이안 보스트리지와 함께 EMI에서 발매한 슈만의 , 2종의 슈베르트 가곡집, , 헨체 음반은 그라모폰 상과 에디슨 상을 수상하였다. 이안 보스트리지와의 프랑스 가곡집(EMI), 앨리스 쿠트와의 하이든과 슈만, 말러 작품집(EMI), 카타리나 카르네우스와의 시벨리우스 가곡집(Hyperion) 등 활발한 음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벨치아 콰르텟, 매지니 콰르텟, 런던 윈드, 시마노프스키 콰르텟 등과 실내악 활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암스테르담과 옥스포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였다. 암스테르담과 쾰른에서는 바리톤 사이먼 킨리사이드와, 비엔나 무직페라인, 런던 위그모어홀, 북미에서 제랄드 핀리와의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암스테르담의 콘서트헤보우, 비엔나 콘체르트 하우스에서는 소프라노 조안 로저스와,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는 바리톤 올라프 베어와 연주하였다. 지난 2004년 이안 보스트리지의 첫 내한공연에서도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며 명실공히 최고의 가곡 반주자로 인정받은 바 있다.

 

공연_preview

이안 보스트리지
슈베르트의, 슈베르트에 의한, 그리고 슈베르트를 위한 테너

글: 노승림,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그의 데뷔 레코딩이었다. 하이페리온에서 이십여 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제작한 방대한 <슈베르트 에디션> 중의 스물다섯 번째 시리즈에 해당하는 이 음반 커버에는 여리여리하다 못해 창백해 금세 쓰러질 것만 같은, 데뷔 1년 차의 창창하게 젊은 보스트리지가 어두운 조명 아래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허무한 표정을 짓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표정은 이 음반이 자랑하는―거의 책 한권 분량이나 다름없는―두툼한 부클릿보다도 이 노래를, 보스트리지의 음성을 훨씬 더 압축적으로 잘 설명한다. <슈베르트 에디션>을 진두지휘하는 그레이엄 존슨이 피아노로 따라 붙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라는 거장의 목소리가 연가곡 중간 중간 끼어들며 뮐러의 시를 읊조렸지만 새내기 테너 보스트리지의 존재감은 그들 둘을 단번에 능가했다. 비록 존슨의 작품해설과 디스카우에 밀려 그의 프로필은 음반내지에서도 제일 뒷면 하단에 짧게 거론되는 수준에 그쳐 있지만 말이다. 결국 이 작품의 히트로 보스트리지는 하이페리온 <슈베르트 에디션>의 간판스타로 등극하고 더 나아가 메이저 음반사인 EMI에 안착한다.

EMI로 건너온 뒤에도 슈베르트는 보스트리지의 주력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하이페리온에 남긴, 이미 충분히 우리 시대의 명반으로 입지를 굳힌 <물방앗간 아가씨>까지도 10년 만에 다시 녹음한 것은 의외의 시도였다(2004년/미츠코 우치다 협연). 보스트리지가 직접 쓴 음반내지에는 지난 날 그가 데뷔 음반에 남긴 아쉬움이 무엇이었는지 나지막하지만 당당하게 깔려 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내가 사랑에 빠졌던 첫 슈베르트 사이클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 첫 연가곡이었던 것 같다. 그 실패한 사랑 이야기, 즉 더 경험이 많고, 더 매력적이고, 아마 더 나이가 많은 경쟁자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좌절하는 순수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가 내 청춘기의 가슴에 얼마나 커다란 호소력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쉽다. 슈베르트의 많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작품 역시 작곡가 자신의 삶과 직접 연관되는, 즉 쉽게 어떤 전기적인 어떤 것으로 해석 받는 특권을 지녀왔다. 슈베르트 시대 이래로 음악 해설가들은 으레 그렇게 해왔지만, 이젠 그런 일을 줄여가야 한다. 추측은 자신의 감정을 예술적이지도 않은 멜로디 안에 마구 쏟아 붓는 풋내기 예술가의 작품을 다룰 때나 필요한 것이다.”

존슨과 디스카우라는, 두 명의 위대한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들의 권위에 짓눌려 있던 그는 더 나이가 많은 경쟁자에게 슈베르트에 대한 사랑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것이 아닐까? 확실히 그의 두 번째 <물방앗간 아가씨>는 대단히 능동적이고 극적이며, 또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그것은 10여 년 전 듣는 이의 가슴을 녹여 내렸던 가늘고 창백한 호소력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음악은, 그중에서도 특히 노래는 보스트리지의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스트리트햄 지역에 있는 교회의 합창 단원이었고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마이클 스펜서에게서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아 열두 살 때 <바위 위의 목동>과 바흐 칸타타를 대중 앞에서 노래했다. 아직도 바흐의 수난곡과 브리튼의 오페라, 무엇보다 슈베르트의 리트를 노래할 때면 스펜서의 가르침이 떠오른다고 할 만큼 이 스승은 직업 성악가로 데뷔한 후 후원자로 만난 디스카우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그의 인생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후로 약 16년간, 그의 삶에 음악은 찾아오지 않았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나란히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박사학위까지 딴 그는 학문의 길을 충실하게 걸었다. 그 사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는 전혀 없었고 피아노를 포함에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전혀 없었다. “나는 아카데믹한 사람이었습니다. 음악 교육을 한 번도 학교에서 정식으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음악가가 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음악 이론은 조금 공부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였지요.”

그런 그가 무려 서른(!) 살에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결심하고도 걱정이 줄을 이었지요. 가장 큰 건 목소리였어요. 십 수 년을 노래를 부른 적이 없는 데다 제대로 교육도 못 받았으니 온전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당연히 고민했죠. 나이가 나이인 만큼 돈벌이도 문제였고요. 성악을 시작하기로 나 혼자 결심만 했지 딱히 앞날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의 이 모든 걱정은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1년 반 만에 모두 해결되었다. 캐슬린 페리어 콩쿠르와 리처드 타우버 콩쿠르에 차례로 결선까지 오르면서 자신이 생긴 그는1991년 내셔널 음악협회에서 우승과 동시에 에소 상을 거머쥐었다. 이 대회의 부상으로 주어진 1993년 위그모어 홀 데뷔 무대에서 디스카우와 그레이엄 존슨의 눈에 띠어 존슨의 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고, 그 인연이 하이페리온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시대의 명실상부한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가 탄생했다.

2004년 마찬가지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가지고 한국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을 때, 밀착취재를 핑계 삼아 이틀 내내 따라붙어 지켜본 보스트리지의 모습은 의외로 소박하고 털털했다. 그는 까다로운 영국 도련님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날카로운 유머를 날릴 줄 아는 유쾌하고 여유로운 훈남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는 직업적인 예민함을 그대로 노출시키기도 했는데, 그 표정이 누그러지는 때는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가 유일했다. “아들이 내가 보고 싶대”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의 장래 희망은 뜻밖에도 위대한 성악가가 아니라 “좋은 아빠”였다.

“성악가는 어차피 하루살이 인생이에요. 유행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잊혀지지요. 반면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자식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반대로, 그 ‘하루살이 인생’이 무대에 설 때는 최선을 다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단 한 번, 그 순간밖에 그 노래를 부를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니까요.”

인터뷰와 방송 출연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틈틈이 평생의 음악적 반려자 줄리어스 드레이크(피아노)와 <겨울나그네>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모습 또한 곁에서 지켜보는 필자로서는 의외의 풍경이었다. 당시 그 공연은 세계 순회 리사이틀이었고, 이미 여러 차례, 길게는 십 년을 훨씬 넘게 함께 보조를 맞춘 그들이 굳이 새롭게 나눌 의견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던 것이다.

“무대에 오를 때 마다 새로운 슈베르트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매번 똑같은 해석에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관객들도 지루하겠지만, 그 전에 나부터 질려버릴 거예요. 매일 같이 부르다 죽어도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슈베르트의 노래는 수만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당시 그의 <겨울나그네>는 확실히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던 그의 이미지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했다. 이론과 고증에만 충실할 것 같은 이 지적인 테너에게서 발견한 뜻밖의 즉흥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적이다(intellectual)”이란 말에 금세 경기를 일으켰다.

“세상에 지적인 성악가란 없어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지적일 수는 없지만 지적인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는 소립니다. 그 둘은 정말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서로 상충되는 말이에요. 나는 노래를 부를 때 절대로 지적이지 않아요. 노래 그 자체가 되려고 하지요.” 4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 그가 이번에는 어떤 <물방앗간 아가씨>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는 할지언정 예상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그램소개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F. Schubert      Die schone Mullerin, D. 795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시인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총 20곡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슈베르트로서도 처음 낸 가곡집이지만 낭만파 시대에 처음 출판된 가곡집이기도 하다. 물방앗간의 처녀와 고용인인 사나이와의 사랑을 테마로 한 것으로, 소녀의 아버지와 사랑의 라이벌인 사냥꾼과 시냇물과 물방아 등에 대하여 지은 소박한 전원의 소품집이다.

이 작품의 특색은 일관된 이야기식(式)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분공(製粉工)으로서 도제(徒弟)과정을 마친 한 젊은이가 독립된 장인(匠人)으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수업여행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어떤 냇가에 있는 물방앗간에 취직하여 그 집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온 정성을 다 바치지만, 그 아가씨는 잘생긴 사냥꾼에게 끌리므로 젊은이는 실연(失戀)하고 만다. 괴로움을 겪은 뒤에 그는 냇물에 몸을 던져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

이 가곡집은 1824년에 작품번호 25로 출판되었으며, 슈베르트의 친구이자 미성(美聲)의 테너인 카를 센슈타인 남작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전곡이 콜리우스 슈톡하우젠에 의해 초연된 것은 1856년으로 곡이 완성된 33년 뒤의 일이었다.

01. 방랑  (Das Wandern)
02. 어디로?  (Wohin?)
03. 멎어라 (Halt!)
04. 시냇물에 감사 (Danksagung an den Bach)
05. 하루 일을 끝내며 (am feierabend)
06. 알고자 하는 마음 (Der Neugierige)
07. 초조 (Ungeduld)
08. 아침인사 (Morgengruss)
09. 방아장이의 꽃 (Des Müllers Blumen)
10. 눈물의 비 (Tränenregen)
11. 나의 것 (Mein)
12. 휴식 (Pause)
13. 녹색 리본으로 (Mit dem grünen Lautenbande)
14. 사냥꾼 (Der Jäger)
15. 질투와 자존심 (Eifersucht und Stolz)
16. 사랑하는 빛깔 (Die liebe Farbe)
17. 나쁜 빛깔 (Die böse Farbe)
18. 시든 꽃 (Trockne Blumen)
19. 물레방아와 시냇물 (Der Müller und der Bach)
20. 시냇물의 자장가 (Des Baches Wiegen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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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보스트리지 "직장 상사 괴롭힘 이기려 성악에 빠져"
옥스퍼드 박사 출신 정치평론가 겸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옥스퍼드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방송국에 다녔는데 직상 상사가 심하게 괴롭혔어요. 당시 유일한 돌파구는 노래였어요. 음악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으려고 했는데 실력이 상당해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게 됐죠."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ㆍ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지적인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44)가 성악에 입문한 과정은 매우 독특하다. 6세부터 교회 합창단을 시작한 후 가곡이 좋아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성악가의 길을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는 일과 지독한 직상 상사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방송국을 그만둔 후 보스트리지는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쓰면서 1991년 영국 연방정부 음악협회 영콘서트 아티스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3년 후 30세에 늦깎이 성악가로 바즈 루어만 감독이 연출하는 브리튼 오페라 `한여름 밤의 꿈`(1994년)에 캐스팅됐다.

19일 오후 8시 고양아람누리극장 음악회를 위해 내한한 보스트리지는 "그 공연을 통해 프로 연주자로서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내가 음악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맑고 고운 음색을 지닌 보스트리지는 서정적인 독일 가곡 전문가로 유명하다. 1996년 데뷔 음반도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였고 이 노래를 9년 만에 재녹음했을 정도로 슈베르트를 사랑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공연일인 19일은 슈베르트 서거일이기도 하다.

"12세에 음악선생 덕분에 슈베르트에 빠지게 됐어요. 당시 `바위 위의 목동`을 불렀는데 선율이 아주 아름답고 혁신적이어서 반했죠. 슈베르트는 순수하고 인간 내면을 잘 반영하는 작곡가예요."

문학평론지(the Times Literary Supplement)와 정치잡지(Standpoint)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그에게 역사ㆍ철학 박사 학위가 노래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자 "직접적 연관은 없다"며 "단지 음악 역사와 배경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상상력을 키워준다"고 답했다. 아내와 떨어져 있기 싫어 국외 장기 오페라 무대를 피하고 있는 그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악가가 된 후에는 불행한 적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