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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네

작가 정체성도 '민주주의 역사'도 다 버린 황석영

작가 정체성도 '민주주의 역사'도
MB와 손잡기 위해 다 버리는구나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본 황석영 논란] 중견문인의 '소영웅주의' 결과
09.05.16 09:40 ㅣ최종 업데이트 09.05.16 12:49 이명원 (racan)

  
5월 14일 이명박 대통령 카자흐스탄 방문에 동행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소설가 황석영
ⓒ 청와대 제공
황석영

오늘자(15일) 속보를 보니 연일 이명박 대통령을 중도실용주의자로 치켜세우고 있는 소설가 황석영이 '유라시아 특임대사'로 내정되었다고 한다. 그 자신 수년 전부터 '중도'의 가치를 역설해왔다고 하지만, 오늘의 '전광석화'와 같은 체제협력의 태도에서 '진정성'을 읽어내기란 좌우 모두 어려운가 보다.

 

일찍이 스스로의 보수성을 드러낸 소설가 복거일이 배신감을 피력하는 것을 비롯 다수의 보수인사들이 황석영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것을 보면, '배신감'은 오늘날 황석영이 한국사회에 초래한 특이한 '감정의 구조'인 듯하다.

 

과거의 행동과 말을 부정하는 지식인

 

나는 '배신'이라는 말보다는 지식인의 발언에 대한 '책임'과 이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지성사나 정치사에서 '배신'은 너무 흔한 일이었지만, 지식인의 '책임'에 대한 '판단'은 지속적으로 회피되어 왔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체제에 기꺼이 '협력'하면서도, 그것이 '저항'의 일종이라는 항변을 해왔던 지식인은 식민지기 춘원 이광수를 포함해 자못 긴 리스트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과 '판단'이 한국에서 제대로 논파된 적이 있었는가? 그것이 부재했기에 '배신'과 '변절'이라는 감정적 언사만이 남발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황석영이 일찍부터 '중도'를 논하고, 사적으로 MB와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그를 신뢰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공적으로' 그가 선거 직전에 했던 발언을 상기해 보자면, 적어도 이는 교언영색에 불과하다. 지난 대선 직전이던 2007년 11월 22일 여의도에서는 '잃어버린 50년 되찾은 10년'이라는 주제로 '2007 창작인 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례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해 발언했는데, 이에 대해 황석영은 "오늘의 취지를 설명하고 초대요청을 드렸다"며 자신의 역할을 거론했다. 사실 이 자리는 선거 직전까지도 지지부진했던 여권의 후보단일화를 역설하는 자못 비장한 자리였다. 당시 황석영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연합정부를 전제로 한 선거연합"을 개혁진보세력들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석영과 인터뷰했던 기자가 "이번 대선을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난 100년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북미관계의 변화를 통해 동북아시아가 경천동지할 상황이고 한반도의 역사를 변화시킬 계기가 왔는데 일부에서는 햇볕정책 이전의 대결적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반북적 시각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남쪽에 운하나 파겠다고 하는 반역사적, 반현실적 인식을 가진 분들이 있다. 이번 대선은 해방 이후, 민주세력의 정권 교체 이후 겨우 정착된 민주주의가 내용적으로 선진화할 기회다."

  - 박형숙의 대선진맥 25: 총대 민 황석영 "연합정부 전제로 후보단일화해야", <오마이뉴스>, 2007. 11. 22

 

그가 위에서 비판하고 있는 세력이 누구인지는 독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역사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과거의' 황석영이 얼마나 비감한 톤으로 말하고 있는 지도 눈치채셨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황석영은 이런 '과거의' 행동과 발언 모두를 부정하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그가 부정하고 있다면 이는 지식인의 '책임'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며, 망각하고 있다면 그가 '말'을 맥락 없이 '남용'하고 있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그는 작가로서도 지식인으로서도 용인될 수 없는 돌출적 말과 행동의 곡예를 시류를 추수하면서 펼치고 있는 결과가 된다.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총대'를 메는 일을 반복하면서.

 

국가폭력에 의한 자국민 학살을 '큰 틀'에서 보자고?

 

  
이명박 대통령이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국립대한민국관 건립위원들과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석영(소설가), 김종규(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이명박 대통령, 김진현 위원장(세계평화포럼 이사장),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 청와대 제공
국립대한민국관

 

그런데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하면서, 그가 언론을 통해 피력한 발언은 논리적으로도, 작가의 존재근거라는 점에서도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론인터뷰를 통해 '용산참사'를 "이명박 정부의 실책"이라고 간단히 정리하고(공권력의 진압와중에 인명이 살상된 사태를 단지 '실책'으로 볼 수 있나),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을 "광주사태"로 명명한 후 "그런 과정을 겪으며 사회가 가는 것이고, 큰 틀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 대처정부 시기에도 시위 군중에 발포에 30~40명이 죽었지 않느냐, 프랑스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진술도 보태졌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최재천 전 의원이 이미 적절히 지적한 바대로,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독재권력에 의해 자행된 엄청난 비극을 그가 "큰 틀"에서 봐야 한다고 자못 대범한 척 싸늘하게 발언하고 있는 모양새다.

 

작가라고 하는 자가 국가폭력에 의한 자국민 학살을 "큰 틀"에서 보자고 역설하는 이 비인간적· 몰역사적 상황은 인간성 말살의 '실용주의'적 태도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가 광주항쟁의 르포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작가이고, 광주항쟁 당시는 물론 지금도 집회현장에서 자주 불리워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그 비장한 가사를 백기완 선생의 시를 개사해 작사한 당사자라는 사실이 진실이라면, 그는 지금 개인사와 역사 모두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큰 틀"이라는 그의 표현에서처럼, 황석영은 자신의 기묘한 주장을 피력하는 대목에서는 항상 '거대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기를 즐긴다. <경향신문> 2009년 3월 17일자에 실린 '남북 막힌 혈로 뚫고, 이념정쟁 탈피, 백년대계 세워야'라는 인터뷰를 보면, 6.15 공동선언조차 20년 전 방북  당시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가능해진 것처럼 회고하고 있는 발언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는 황석영 개인의 주관적 몽상에 불과하다.

 

위험한 구상 '몽골연합론'

 

"큰틀"을 좋아하는 황석영은 이번에는 돌연 "몽골+2코리아"라는 '몽골연합론'을 제시해 논란을 깊게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를 "알타이 경제·문화 연합론"으로 말하고  있기도 한데, "혈연적 연합"이라는 설명이 눈에 띈다. 이런 기묘한 연합을 왜 하는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과 중국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남한과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식량과 자원을 활용하고, 남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해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개발'함으로써, 선진국으로 우리가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큰 틀"에서의 '몽골연합론'은 매우 위험한 구상이다. 일단 이 연합의 의도가 드러나는 한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반도에 대한 견제와 갈등은 가중되어, 가뜩이나 심각한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싼 긴장은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을 '선진화'한다는 미명 아래, 몽골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류 제국주의적·신자유주의적 광기가 더욱 확대될 것이며, 의도와는 반대로 남북한의 노동조건은 현재보다도 더욱 형편없는 수준으로 악화될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의 배만 부르게 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의 국가성격을 아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삽질경제'의 아시아적 확대이자, 한국발 아류제국주의의 체제화에 불과할 뿐이다.

 

동시에 "혈연 공동체" 운운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파시즘의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일본의 군부와 결탁한 산업화 세력은 조선과는 혈연적 친밀성을 강조하는 한편(이른바 '동조동근론'), 중국·대만·만주에 대해서는 '동아연맹론'이라는 경제·문화공동체론의 외피를 쓴 침략논리를 제창했다. 물론 그것은 위장된 침략논리였다. 표면적으로는 근대화에 미달된 국가와 민족을 해방시켜 일본과의 연합을 통해 문명화하겠다는 것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이었지만, 이는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을 강화시키는 것과 함께, 제국주의적 노동·상품시장의 확보를 요구하는 산업자본의 요구를 충족시키겠다는 파시즘적 야욕의 산물이었다.

 

내게 황석영이 "큰 틀"에서 주장하고 있는 '알타이 문화연합'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런 제국주의-파시즘적 사유의 뒤늦은 한국적 재현이자 아류로 보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공안탄압' 앞에서 중도 말하는 중견작가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황석영은 '국가주의자'에서 '제국주의자'라는 더 나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남북한의 평화를 말하고, 알타이 문화의 동질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이란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과 관련된 것뿐이라는 점이 이를 증거한다.

 

  
소설가 황석영씨.
ⓒ 권우성
황석영

동시에 황석영의 주장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완전히 휘발되었다는 것은 이것의 중요한 증좌이기도 하다. 그가 오늘의 처참한 한국 민주주의의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만 있다면, MB 정부를 일컬어 '중도' 운운하는 교언영색을 피력할 배짱은 없었을 것이다. 사법, 행정, 입법 분야의 황망한 상황은 물론이고, 언론을 포함한 공론장의 붕괴와 시민사회에 대한 작금의 '공안탄압' 앞에서, 황석영이 반복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중도' 운운하는 정권의 성격에 대한 평가란 사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인가.

 

동시에 명색이 중견작가란 분의 '입'에서 "큰 틀" 운운하면서 지난 역사를 부정하고, 민주화의 와중에 또는 생존권 투쟁의 와중에 죽어간 고인들에 대한 일말의 윤리적 태도나 최소한의 공감적 추모 없이, 자신의 체제에의 야합을 마치 무슨 거대하고 숭고한 신념 때문인 것으로 과장하는 허위의식을 취할 빗나간 대담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는 진보세력에 한정되는 무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망각하는 반인문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작가란 근본적으로 비체제적인 존재다. 그것은 체제의 비인간적인 압력에 대항하여 인간성을 옹호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연약한 '언어'를 통해서나마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수호하고자 하는 일에 진력하는 존재가 작가라는 당연한 의미에서다.

 

그러나 오늘의 황석영은 "큰 틀"에서의 신자유주의 체제옹호와 자본의 이익을 '선진화'라는 표현을 통해 절대화하면서, 마치 자신이 한국사의 방향은 물론 세계사적 변혁을 앞장서서 계도해나가고 있다는 식의 빗나간 '환상'에 몰입하고 있다. 오늘의 시대가 낡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시대'도 아니건만, 그는 신화에 곧잘 등장하는 영웅들의 몰락의 원인이 되고 있는 오만함(hubris)을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황석영의 체화된 '소영웅주의' 탓에 스스로의 작가적 정체성은 물론 자신의 개인사와 한국의 고통스런 민주주의의 역사 모두를 그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일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분명해진 것은 그가 꿈꾸는 "큰 틀"의 진정성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작가 황석영을 존중했던 독자들의 빛나는 시간은 이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황석영은 어디로 가는 걸까?   

황석영과 손호철

[손호철 칼럼] MB를 둘러싼 엇갈린 행보

최근 진보문학계의 대표주자인 황석영 씨가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하며 "이 대통령이 중도적 생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돕기로 했다고 말해 파란이 일고 있다. 이를 바라보며 떠오른 것이 문득 이 대통령을 둘러싼 황석영 씨와 나의 엇갈린 행보이다(물론 나를 '급'이 다른 황석영 씨와 비교하는 것은 황 씨에 대한 결례지만 말이다). 이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를 둘러싼 혼란을 해소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2007년 대선을 한 달 앞둔 11월, 황 씨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진보 진영의 원로 16인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반한나라당 후보 단일화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세력이 기세등등한 반면 민주개혁을 주도해 온 사람들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 우리 사회에는 아직껏 상식과 몰상식의 대립 구도가 유효한지도 모른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사회악과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그 동안 한국의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많은 이들이 열정적으로 헌신해왔고, 이만큼이나마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한다. 지금이야말로 민주개혁 세력이 한번 더 분발하여 상식의 지배 영역이 넓어지는 미래를 확정 지을 때다." 한 마디로, 이명박 후보는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반민주수구냉전세력이자 말이 안 되는 몰상식"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 민생문제가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반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아직도 낡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 매달려 있는 잘못된 개입이라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이 지면에 2007년 12월 20일 쓴 칼럼(☞관련 기사 : "낡은 87년 체제는 가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정동영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진영이 그나마 선거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간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해 발본적으로 자기비판을 하고 문국현 후보처럼 반신자유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며 다시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자유주의진영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느니 "개성동영"이라는 구호 아래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수구 대 개혁의 구도에 매달려 있었고 시민사회의 원로들 역시 철 지난 반수구 반한나라당 로고송이나 부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역시 낡은 주사파와 민족해방파의 논리에 의해 코리아연방 운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얼마나 자기개혁을 하고 새롭게 태어나느냐는 것이다. 자유주의진영은 지금이라도 그간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해 발본적인 자기비판을 하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위기를 다시 한 번 봉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재창당수준의 대수술을 해야 한다. (중략) 확실한 것은 이명박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 정권, 아니 노무현 정부보다 더한 신자유주의 정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현대시절의 신화를 되살려 총량기준으로 경제를 되살려 낼지는 몰라도 사회적 양극화와 민심파탄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지한 많은 민초들은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의 집권에 따라 예상되는 일정한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금강산 총격사건 후 급격히 대북강경책으로 돌아서고, 촛불 집회가 사그라진 뒤 돌격전, 속도전을 내세우며 민주주의를 공격하자 입장이 다소 변화했다. 즉 2007년 대선이 신자유주의와 민생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은 여전히 맞으며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반신자유주의전선이 가장 중요한 전선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 특히 촛불 집회 이후 행각은 내 예상보다 '반민주적'이었다. 이같은 반민주성이 촛불 집회, 금강산 총격 사건 등의 '상황적 산물'(김영삼 정부의 수구화가 남북정상회담 직전의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라는 우발적 사건의 결과이듯이)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수구성'과 '반민주성'을 다소 과소평가했던 것 아닌가 하는 자성을 했다. 나아가 죽어가는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을 다시 기사회생시키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 정책을 보면서 반MB 전선의 타당성(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중심성을 전제로 한)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게 댔다. 예를 들어, 올 초에 쓴 한 글('이명박정부의 속도전과 진보진영의 대응', <진보평론> 39호, 2009년 봄)에서 이같이 주장한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보수적 정치인이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 내의 냉전적 보수세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중도적이고 극우적 이념노선보다는 실용주의를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선포하고 이념공세로 나가리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행태는 놀랍다. 국가정체성 운운하며 사실상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선포하고 나섰고 대북정책 등에서도 실용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이 그동안 내세웠던 실용주의는 일종의 위장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상황적 산물'처럼 보인다.

이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촛불시위라는 예상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고 임기 초기의 대통령으로는 유례없이 낮은 지지율을 기록해야 했다. 성공신화에 익숙한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는 자존심이 심히 상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결국 이 모두가 좌파의 음모라는 식의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같은 인식이 기이한 마녀사냥과 이념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이 추진해온 정책의 차질이 좌파적 고위공직자의 저항 탓이라는 기이한 마녀사냥이다. 대북정책도 금강산 총격이라는 우발적 사건이 있었는데다가 사건 직후 행한 국회연설에서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유화적 입장을 취한 것이 일종의 족쇄가 되어 이후 강경노선으로 나가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 지면에 2009년 2월 23일 쓴 글(☞관련 기사 : "박근혜 차기 선거운동에 올인한 MB 집권 1년?" 2009년 2월 23일)에서는 이대통령의 첫 일년은 '이명박=중도실용주의, 박근혜=꼴보수'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자신이 꼴보수와 '무대포'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박근혜 의원을 민주적 지도자로 만들어준 한 해"였고 그 결과 이명박=꼴보수, 박근혜=중도실용이라는 식으로 '선수교체'가 일어나고 있다고 풍자한 바 있다

▲ 소설가 황석영 씨와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그러나 황석영 씨의 행보는 나와는 정반대다. 그는 앞에서 보았듯이 대선 전의 경우 이명박 후보가 내건 중도실용주의는 거짓에 불과하고 이명박 후보는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반민주수구냉전세력이자 말이 안 되는 몰상식"이기 때문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선 후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 미네르바 구속, 용산 학살, MBC <PD수첩> PD 체포, 각종 소위 MB악법 등을 보고도 오히려 입장이 "중도적 생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 중도적 지도자라는 식으로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으로 바뀌었으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역시 '시대의 소설가'다운 문학적 상상력이다.

황 씨는 이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으로 보는 이유로 "스스로 중도실용이라고 한다"는 것을 들었다. 또 파문이 커진 뒤 이명박 정부를 진짜 중도실용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이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들고 나와서 당선됐잖냐"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한 정치 세력의 성격을 그들의 구체적인 정책이나 실천이 아니라 말로 주장하는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이다. 그렇다면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민주정의당)은 학살세력이 아니라 '민주정의세력'이다!! 민정당, 만만세다!!

황석영 씨가 개인적 인연이든, 노벨문학상에 대한 욕심이든, 어떠한 동기에서든 이 대통령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유라시아 평화열차'프로젝트처럼 민족의 미래에 대한 '대붕'의 통 큰 기획을 가지고 이 대통령을 현재의 극우적 노선으로부터 공약했던 중도실용노선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대통령을 돕고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대통령의 현 노선이 중도노선이라는 식으로 현실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길이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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