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기고
명태균과 박정혜와 소현숙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길 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묻고 싶다. 명태균을 아느냐고. 거의 안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길을 막고 묻고 싶다. 박정혜, 소현숙을 아느냐고. 아마 대부분 모른다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하지 않을까.
공천개입, 2000장이 넘는다는 김건희와의 카톡 등 수많은 화제를 뿌린 명태균은 몰라도 되는 사람이다.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재미있다. 구중궁궐 심산유곡의 비사들이 매일 터져나오는 요즘 뭔가 쾌감마저 느껴지며 내일은 어떤 게 나오려나 궁금해서 잠도 안 올 지경이다.
반면 박정혜, 소현숙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노동자들은 그렇게 쉽게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라고 불탄 공장에서 300일을 버틴 사람들. 근데 이 스토리는 재미가 없다. 잘리고 싸우고 삭발하고 단식하고 고공에 올라가고 그러다 누군가는 죽고. 유사 이래 뻔한 스토리니까. “배 나오고” 지가 뭘 안다고 “철없이 떠드는 오빠”도 없고, “아휴 뭘 이런 걸” 하면서 받아 챙긴 “파우치, 외국 회사 그 쪼만한 백”도 없고, 주식으로 수십억원을 번 재테크 신화도 없다.
어쩌면 박정혜, 소현숙도 허공에 뜬 그 막막하고 아득한 시간들을 그런 뉴스들로 때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왜 우리 얘긴 아무도 안 할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아예 잊은 게 아닐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 당시 희망버스가 오던 날, 가족대책위 대표가 희망버스 승객들에게 아이를 업은 채 이런 말을 했다. “희망버스가 오기 전 너무 무서웠다. 세상 사람들이 우릴 다 잊은 게 아닐까. 김진숙 지도님은 저 위에서 말라죽는 게 아닐까.”
희망버스가 오기 전 나는 하루에도 수십번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람들 시선을 확 끌 만큼 인물이 잘났다면, 노래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거나 피리라도 불 줄 알았으면 사람들이 여길 와보지 않을까.
콘크리트가 달아올라 찜통 같던 여름을 지나 고공의 밤은 어느새 겨울일 것이다. 봄과 가을이 없던 기억. 뼈가 시린 게 어떤 추위를 말하는지 난 크레인에서 겪었다. 그러나 정작 뼈가 시린 건 외로움이고 고립감이었다. 재미있는 영화 기사를 보다가, 여기서 코 닿는 데 있다는 영도 유명 맛집을 보다가, 가을에 좋은 여행지를 보다가 문득 치받치던 서러움. 세상 사람들이 다 짠 듯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허공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얘기들을 혼자 절박하게 떠드는 내가 나도 믿어지지 않았다.
소현숙, 박정혜는 어떤 생존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까. 얼마 전 남화숙 교수가 쓴 <체공녀 연대기>라는 책을 읽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을밀대 지붕 위에서 농성을 했던 강주룡부터 2011년 한진중공업 85크레인 김진숙까지의 여성 고공농성 투쟁기다. 그 책은 김진숙까지다. 거기서 끝나야 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유구히 이어져 2019년 도로공사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2020년 영남대의료원 박문진, 2024년 구미 옵티칼 박정혜와 소현숙까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소현숙, 박정혜는 김진숙의 309일 기록마저 깰 참이다. 이어질 필요가 없는 역사가 이어지고 깨질수록 참담해지는 기록이 깨지고 있다.
노동자는 죽어야, 그것도 여럿이 한꺼번에 죽어야, 어이없이 죽어야 기사 한 줄 날 뿐이고 극단적이어야 잠시 관심을 끌 뿐이다. 허리도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뒤주만 한 공간에 사도세자처럼 갇힌 노동자로 인해 하청노동자의 현실이 저 정도였냐며 비로소 사람들은 놀랐고, 몇년 후 그 유최안은 다시 반짝 기사화됐다.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고. 김건희를 기소도 못한 그 검찰로부터.
더 늦기 전에 박정혜와 소현숙이 내려와야 한다. 동료들의 손을 잡고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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