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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네

갑사와 월인석보 목판본 내력

2021년 10월23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갑사에서 월인석보 해설 강의가 있었다. 

오전에는 월인석보 목판본이 있게 된 갑사와 월인석보가 갖고 있는 의미 중심으로 강의하였다. 

한글날의 유래는 1928년( 경인년) 가갸날이라고 한글날 기념을 시작하였다. 이 해는 대홍수가 있었던 해였다고 한다. 가갸날의 근거는 한글창제된 날부터 8회갑을 맞은 날을 잡아 기념하였다고 한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발족되는데 세종실록에 의해 9.29일에 완성되었으나 음력인 관계로 .10월 24일, 10월 29일 등으로 날짜의 혼란이 왔다. 이는 서양의 율리우스력이라서 4년마다 윤년을 넣을 수가 없어서 그레고리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000년 2월29일에 맞춰 오늘날 10월 9일이 한글날로 제정이 되는데 이는 세종실록에서 말한 것을 근거로 정해졌다고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글자가 만들어진 원리와 사용 방법을 기록하여 전해지고 있는 글자는 없다고 한다. 우리 한글만 그 원리를 과학적으로 만들었음을 알리는 <<훈민정은 해례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해례본이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고 찾을 길이 없다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이기 때문에 숨겼다가 해방 뒤에 공개하였다. 

이 해례본은 원래는 관음사 복장품이었다가 상주의 고서점에서 판매를 하던 중 성주 배모씨가 소장을 하게 되었는데 국가에 천억을 요구하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한글 창제한 날에 대한 근거는 해례본 마지막 장에 '정동 11년, 세종 28년 9월 상한'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것을 근거로 10월 9일로 확정이 되었다. 

한글 반포에 대한 기록이나 행사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데 창제 당시 신하들의 반대여론이 극렬하여, 지금철 공문으로 사용을 한다거나 널리 알리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까닭은 불교 경전에 한글을 사용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한글로 출판한 40여 종류에 30여 종류는 모두 불교에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석보상절 24권이 15~16세기에 한글을 기록으로 남겼다면 그 다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한글 성경이 만들어지면서 하층민들에게 한글 보급이 되었다.  직지심체요절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훨씬 앞섰는데 이는 두 활자 모두 하나는 불경 출판을 위해, 다른 하나는 성경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수요가 있으면 공급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목판으로 인쇄를 하다보니 나무가 너무 많이 필요하고 판목이 부족해지자 금속활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유추하시는데 일리 있어 보였다. 

우리나라는 문맹율이 아주 낮아서 요즘은 문맹율 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500년을 기록한 역사인 <<고려사>>, 조선 500년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록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인데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로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셨다. 

또하나 흥미 있었던 것은 시저암호법(알파벳에 순서대로 1부터 26까지 숫자를 붙인 것) 으로 10가지 욕망을 나열하고 가장 큰 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가장 큰 수는 마음가짐(interest)으로 110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어떤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마음가짐과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며 재미를 주셨다. 

한글은 집현전 학자가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든 것 뿐으로 실제로는 세종대왕과 여러 승려들이 발음기관을 연구하여 자음을 만들고 하늘, 인간, 땅이라는 철학을 근본으로 해서 모음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많이 달라서 더 흥미있었다. 

1447년에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위로하는 '추선 불사'로 <<석보상절>>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죽은이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중국의 책 <<석가보>>, <<석가시보>> 경전을 놓고 직역을 한 석가모니에 대한 위인전기문으로  동주자(활자본)로 만들었는데 10권만 전해지고 있다. 석보상절은 국한문 혼용으로 수양대군이 자유역과 의역을 섞어서 편찬하였다. 석보상절은 24권으로 나머지 14권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은 유교 이념국가이나 기층 민중들은 불교에 대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활자본으로 출판을 하였고, 1580년 대에는 유교의 이념인 경서를 한글로 번역하라고 세종실록에서 명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로 전달이 되었을 때 불경의 부결은 축자로 썼는데 이것을 여러스님들이 한자 띄어쓰기와 더불어 한글 부결을 넣어 석보상절을 완성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세종대왕에게 <<석보상절>>24권을 올리니 답가 형태로 세종대왕이 <<월인천강지곡>>3권을 같은 해인 1447년 만들었다고 한다. 전해진 것은 상권으로 194곡이 쓰여있는데 중권과 하권은 소실되었다. 

불교 경전을 짓는 방법은 산문을 앞에 놓고 뒤에 운문을 놓는 형식이 대부분이나, 1459년 부왕인 세종대왕의 글을 앞에 넣어서 만든 책이 <<월인석보>>이다.  원래대로 한다면 <<석보 월인>>이 되어야 맞다고 한다. <<월인석보>>는 21권으로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1569년에 제작한 판목 4개만 남아 갑사에 보관되고 있다.  

인도는 수 개념이 발달되어 다양한 수가 있는데 그에 비해 중국은 그 보다 적고 우리나라는 최고의 수를 '천'으로 생각해서 '월인천강지곡'이라고 이름 지었고 그 외에도 '골','잘',이라는 큰 수가 있으나 전해지지 않고 생활 속에서 쓰지 않아 잃어버린 수가 되었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조선시대 책 만들기는 재미있는데 가장 마지막에는 책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게 실려 있고, 임금의 글과 함께 쓸 때에는 신하 글은 한 칸을 모두 띄우고 쓴단다. <<월인 석보>> 자료를 살펴보면 맨 위 칸이 모두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글을 '언문'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중국보다 낮춰서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틀렸단다. 세종은 원래 중국 글자와 우리 글자가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시를 '가'라 하고 우리는 '향가'라고, 글을 '문'이라 한 것을 우리는 '언문'이라 했으며, 노래를 '곡'이라 하여 우리는 '별곡'이라 불렀으며 이는 차별성을 드러낸 것이지 우리를 홀대하고 낮춰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언해본은 한자를 한글로 바꾼 것으로 '협주'를 달은 것이라고 했다. 한자 사이나 문장이 끝난 뒤에 '협주'가 달려있는 것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니 한득이니다'는 '적지 않은 시간이다.'로 풀어 썼으며 중국 발음이 이상하면 우리 식으로 발음을 해서 'ㄹ'자로 바꿔 가독성과 인쇄술을 높였으며 한글 자모가 한자와 어울리도록 애초에 개발할 때부터 제작해서 풀어쓰기가 불가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래서 한글을 '방현문자'로 불리며 영어에 비해 가독성이 훨씬 높다고 한다. 

갑사가 소장하고 있는 월인석보 판목은 '백개만'이라는 사람의 시주집으로 본문만 222판목인데 그 중 4판목만 전해지고 있다는 것과 판목을 다음 주에는 먼 발치에서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월인석보 내용은 방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디지털 한글박물관'이나 '서울대 규장각'에 가서 검색해서 알아보라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쳤다. 

 

점심은 절에서 준 공양으로 배를 채웠고, 고려 불화전으로 눈이 호강했고, 갑사 전경이 가을 하늘과 어울려 아주 아름답고 공부할 거리가 정말 많구나, 더 배워야 할 것 투성이구나 하면서 아주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갑사 삼신불 괘불탱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표현 기법과 묘사 정도가 뛰어나 불화 제작 집단의 예술성이 확인되며, 초기 삼신불 괘불탱의 도상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다. 또한 제작 당시의 기록 자료가 남아서 전해지므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1997년 9월 22일,  문화재청 은 괘불탱이 가지는 미적인 측면과 불교 미술사적인 중요성을 인정하여 칠장사, 안심사,  신원사 , 장곡사,  화엄사 , 청곡사에 전해지는 괘불탱들을 각각 국보 제296호부터 제302호까지 지정하였고, 이와 함께 갑사의 삼신불 괘불탱을 국보 제298호로 지정하였다.

 

백제 이래 풍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서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거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 후의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신라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 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써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영규대사를 중심으로 왜군에 항거하는 승병궐기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갑사는 조선 선조 30년(1579) 정유재란 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선조 37년(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월인석보 25권- 보림사 소재

『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월인천강지곡』이다.『월인석보』는 완질이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권의 수량은 확인할 수 없다.

월인석보 권25(月印釋譜 卷二十五)의 편찬 체제는 먼저『월인천강지곡』을 배열하고 이어 여기에 해당하는『석보상절』의 내용을 해설형식으로 실었다. 그렇지만『월인석보』편찬 때 기존의『석보상절』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이를 수정, 보완하여 여러 경전에서 내용을 첨삭하여 싣고 있다.

이 권 25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권의 2장과 일부가 탈락되어 있다. 전체분량 5분의 2에 해당되는 전반부는 2∼4수로 추정되고, 후반부는『월인천강지곡』577∼583까지의 7수와『석보상절』권 24의 내용을 중심으로 싣고 있다.

『월인석보』의 총 권수는 24권 혹은 25권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이번에 권 25가 새로이 발견됨에 따라『월인석보』가 전체 25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한국불교 및 문헌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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