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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청소년 문학

[스크랩] 한국문학 연구·비평의 ‘일본 의존성’ 비판 / 하정일

 

 

 

 

迷惑에 빠진 이론수입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를 돌아보라”

[이슈] 하정일 원광대 교수, 한국문학 연구·비평의 ‘일본 의존성’ 비판
2009년 03월 09일 (월) 15:10:28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중진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하정일 원광대 교수(국문학·사진 오른쪽)가 최근 한국 문학 연구·비평의 ‘일본 의존성’을 작심한듯 비판하고 나섰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오늘의 문예비평>(72호)에 기고한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라는 글을 통해서다. 논쟁이 예상된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첫째, 일본발 담론 수입의 일방성은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에 대한 무관심의 반영이다. 1980년대 본격화된 대학원 학생교류는 일본의 최신 이론 수입 통로를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일본 학계의 유행 담론이나 주요 동향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이것이 ‘쌍방향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일방성 수입에 의존한 결과 2000년대의 문학연구·비평이 우리 내부 즉 “1970~80년대 탈식민적 사유들에 무관심할뿐더러 그것들을 민족주의의 변종 정도로 치부하는 심각한 왜곡마저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하 교수는 작금의 한국 문학연구·비평이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외국 이론을 수용하는 작업은 “민족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식민적 무의식의 發露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부분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계산된 발언으로 읽힌다.


둘째, 수용 과정에서 일본 학술 담론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부족했다. 니시카와 나가오, 우에노 치즈코, 고모리 요이치의 저작들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특수에 바탕해 구성된 담론인데, 이것이 보편으로 정립될 수 있으려면 다른 특수들과의 맞대면을 통해 조정하고 再構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근 한일 학술교류에서는 이러한 ‘보편의 특수화’와 ‘특수의 보편화’라는 왕복운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 교수가 이들에게 돌리는 ‘혐의’는 ‘제3세계의 민족운동에 대한 심각한 무지’(니시카와 나가오), ‘민족 담론의 과잉 일반화’(우에노 치즈코), ‘민족에 대한 강박관념’(고모리 요이치)이다. 요컨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의 진보적 민족 담론들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이들 일본 학자들에게 무엇이 결핍돼 있는가를 강조한 복화술인 셈이다.
셋째, 문제가 보다 심각한 쪽은 ‘한국의 문학연구/비평’이다. 사실 하 교수 글에서 겨냥한 비판의 진짜 과녁은 이 셋째 항과 이어지는 다음 항이다. 왜 그런가.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상에 근접한 연구를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특수의 보편화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특수의 특수성은 규명해냈다,
그러나 ‘우리’는 뭐하고 있냐. “2000년대 한국 문학연구·비평은 일본의 특수 이론을 수입해 그것을 한국근대문학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급급할 따름”,“이식성은 해당 담론을 보편 이론으로 전제하는 안이함에서부터 나타난다.”


넷째, 그 결과 2000년대의 한국 문학연구·비평이 신실증주의의 경향을 극심하게 드러내는 현상이 이어진다. 수입 이론이 보편으로 전제돼 있는 상태에서 연구자나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 이론을 입증할 ‘증거 찾기’에 골몰하는 일뿐이다. “한국 문학 연구·비평 전공자들은, 풍자적으로 말하자면, 증거 수집가가 됐다. 최근 10여 년간 엄청난 양의 한국문학 관련 논저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시대와 대상과 자료만 다를 뿐 내용이 엇비슷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데는, 곧 “이론을 스스로 창출하려는 문제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여기에 기름을 부어준 것이 ‘탈이념화’ 현상이다. 하 교수에 따르면 “신실증주의와 탈이념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악순환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제도사, 풍속사, 문화사를 넘어 사상사나 문학비평사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좀 진부한 이름 붙이기일수도 있지만, 하 교수는 이를 ‘실천적 사유의 거세’ 결과로 본다. 이 대목에서 하 교수는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민족문학론의 유효성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민족문학론의 역사는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의 특수성을 규명하고 또 다른 특수들과의 맞대면을 통해 보편으로의 상호지양을 이루려는, 다시 말해 특수의 보편화와 보편의 특수화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을 통해 보편에 다가가려는 실천적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비평은? 역동성이 없다는 거다.
“소란스러운데 말은 없고, 분주한데 열매는 없다. 이론 수입업자들,  지식중개상들, 증거수집가들이 판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문의 식민성은 그래서 무섭다.”


다섯째, 그래서 “한국 문학연구·비평에 가장 커다란 지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이론가” 가라타니 고진 컬럼비아대 객원교수(사진 왼쪽)에게 주목한다. 황종연 동국대 교수와 평론가 조영일은 고진 수용에 있어서 가능성과 아쉬움을 남기는 존재들이다. 황종연은 진즉부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진술에 동의했었고, 탈근대주의적 문학관을 피력해왔기 때문에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번역가이자 신예 평론가 조영일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고진의 테제를 “너무 쉽게 긍정해버렸다.” “종언론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문학연구·비평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조영일은 신중했어야 했다는 게 하 교수의 불만이다. “문학이 없는데, 문학연구·비평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쟁의 여지를 남겨둔 대목이기도 한, ‘종언론’의 전제와 조건을 두고 하 교수는 가라타니 고진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곡해해 도달한 것(가치를 만들어내는 유력한 장소는 소비=유통영역이다)으로 읽어낸다. 이로써 고진 자신이 설정한 ‘소비=유통영역’이라는 유력한 장소에서 과연 고전적 의미의 근대소설(문학)은 존속하기 힘들겠지만, 여전히 ‘영구혁명 중에 있는 주체성의 표현’(싸르트르)으로서의 근대문학은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조영일의 종언론 해석에는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결락돼 있다”고 보았지만, 조영일로서도이에 대해서 돌려줄  답변이 있을 것같다. 


하 교수가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가라타니 고진의 ‘종언론’은 그 전제와 조건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잉여)가치론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원의 은폐’에 골몰하고 있는 담론이다. 가치의 기원, 유통의 기원, 소비의 기원, 영구혁명의 기원, 주체성의 기원. 근대문학 종언론은 이것들의 기원을 은폐함으로써 성립된 담론이다.” 지배와 저항, 적대와 대립, 주체성의 충돌이 생동하고 있는 ‘생산과 노동이라는 기원’에 기대고 있는 하 교수에게는 기원을 은폐한 가라타니 고진의 담론이란 ‘보편 이론’이 되기에는 여전히 ‘왕복운동’이 불충분한, 수입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수입 담론에 휘둘려 있는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비평도 어떤 ‘迷惑’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그의 추궁은이제 ‘수입’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혐의자들’의 본격적인 반대심문에 마주칠 차례가 됐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와 비평이 일본의 특수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선 하정일 교수(오른쪽). 그는 또한 가라타니 고진(왼쪽)의 ‘종언론’의 전제가 잘못돼있다고 지적한다.

출처 : 바람수업
글쓴이 : 소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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