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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학년 1반

1박 2일 팀 북촌을 탐색하다

2009년 2월 4일 수요일 날씨 흐리다가 맑고 포근해서 정말 입춘다웠다.


2월 3일 10시 22분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갔다. 조선의 진짜 멋을 알아보기 위해. 물론 선비 정신을 보려고 가는 것이다.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어온 선비 정신은 정신문화이고 자양분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무궁화호라서 좀 실망을 하는 눈치였으나 그나마 9인석은 예매가 되고 나머지는 입석이어서 비좁게 가거나 교대로 앉아서 갔다.


서울 도착해서 대합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이 여럿이다 보니 시키는 것도 여럿이다. 돈까스 5, 김밥 2, 비빕밥3,우동1, 순두부찌개1인데 시키고 기다리는 것도 일이었다. 기표 엄마가 계속 전화를 해주셔서 운현궁 매표소에서 1시 30분에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표는 1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많이 변해보였다. 머리가 길어진 탓도 있을게다. 미용실 가기 귀찮아서 기르고 있단다. 내가 안아주려고 반가와서 팔을 벌렸더니 안기지 않고 피해서 서운했다고 하니 머리만 긁적였다.


운현궁에 해설사가 있어서 해설을 부탁했더니 하나마나한 소리만 했다. 더구나 자기는 영어 담당이어서 개관만 설명한단다. 그런데 해설하는 내내 '이씨 조선'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해설사 맞아? 싶었다. 어떻게 '조선'이 아니고 일인들이 폄하해서 말하는 '이씨 조선'이라는 말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쓰고 있을까. 해설사 자격요건이 의심되었다. 곱게 늙은 어른이었다. 교과서 영향도 무시 못 하겠지만 자기 역할에 맞는 사관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얼른 마무리 하게 하고 돌아보았다. 만평에서 천평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그리고 후문만 남아서 명백을 유지하는 운현궁은 조선 말기의 역사를 보는 듯 했다. 자경전의 담벼락 무늬를 발견하고 아이들이 반가워했다. 노안당의 들여다보며 내정 간섭을 했음직 했을 공간을 발견하고는 씁쓸했다. 강당처럼 길게 늘어선 3칸이 넘어 보이는 방에서 갑론을박을 했을 모습들을 상상해 보았다. 기품 있고 단아하고 정갈했다. 더구나 가마 보관소가 두 개가 넘어 보여서 그 위풍을 짐작하게 하고도 남았다.


노락당은 네모반듯한 마당이 인상 깊었다. 그 곳에 차일을 치고 고종과 명성왕후가 가례를 맺었다는 곳이라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리고 신방은 방 3개나 지나야 보이는 처소에서 치뤘다고 해서 멀찍이 그 공간을 눈여겨 살폈다. 운명이 그렇게 험하게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보면 아주 작고 아기자기하다. 여름을 나는 남쪽 서재와 안방의 보료와 궁녀들이 드나들던 사랑채와 부엌을 살펴보았을 때 이렇게 작은 부엌에서 살림을 살았다는 것이 ale기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의 밥을 지어낸 곳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작고 옹색했다. 늘 민속 박물관이나 기타 옛집을 들여다보면 부엌이 늘 아리송하다. 저 작은 공간에서 그 많은 일들을 해냈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공부방도 그렇고 침소로 쓰이는 곳도 그렇다. 너무 작다. 옛날 사람들이 키가 그렇게 작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3층 이불장을 놓으면 두 사람 꼭 껴안고 자도 모자랄 공간을 보면서 늘 갸우뚱하곤 한다. 노락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왕의 가례를 올린 곳의 부엌이라기에는 너무 작았다. 아마 모두 바깥에 솥걸고 불때면서 해냈을 듯 하다. 뒤편 마당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품위 있는 우물 두 곳과 적송이 150년이 넘은 건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창 문살도 화려함이 없는 단정함이 있어 선비가 머무는 곳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궁궐이라는 이미지보다. 그래서 그 환란을 피해갔는지도 모른다. 한번 불태워지지도 훼손되어지지도 않았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싶었다.

이로당은 두 건물을 보다 보니 좀 심심하다. 궁중예절교실학교를 운영하나 보다. 이제 와서 무슨 궁중예절학교인가 싶기도 하다. 그보다는 선비들의 삶의 품격을 알고 배우는 곳이면 더 좋겠다. 처마선이 곱고 고왔다. 빗물이 들어서지 말라고 덧댄 양철처마가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아마 단청과 툇마루와 기둥들을 눈비에 덜 맞게 하려고 한 것 같은데 한복에 서양모자를 쓴 격이었다. 품격이 단숨에 깨져버렸다. 서양 사람들이 오면 우리 지붕이 그리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운현궁의 넓은 터에서 망연자실 한동안 서 있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연들이 오고 갔을텐데 싶으니 내가 밟는 땅 구석구석에 그들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돌담을 끼고 걷는 내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시대의 격량을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애쓴 그들의 고뇌가 느껴졌다.

다음은 북촌문화센터를 찾아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외국인들만 상대를 해서 그런지 여기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연세 많은 남자분이셨는데 해설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랑방, 안방, 건넌방이 정갈하게 네모를 이루면서 만들어진 연결된 툇마루가 인상 깊었고, 뒤뜰에 정자가 현장견학하며 점심이라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너무도 밋밋한 설명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동네로 소위 큰 벼슬아치들이 권세를 등에 업고 오밀조밀하게 살면서 그들만의 정치를 일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설명 대신 아주 귀하고 고귀한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권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마음에 더 들지 않았다. 그냥 집만 남아 있었다. 현대식으로 고쳐서 살고 있는 듯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어 삐져나와 있는 것이 정적을 깨는 것 같았다. 더구나 북촌문화센터를 찾으려고 지하철 입구에 있는 지도를 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지나가시던 노인 한 분이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자애스런 목소리로 말이다.

 

아이들이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하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또 다시 옻칠공방으로 갔는데 안사람만 만나고 제대로 설명도 못 듣고 나와야 했다. 옛날 작은집 살던 그 모습 그대로 네모반듯한 작은 마당이 늘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그 옆으로 윤보선 초대 대통령이 살던 집을 그냥 지나쳤다. 많이 허물어 빈 곳이 많았고, 북촌도 기와집만으로 촘촘하게 이어지지 않고 있어서 이가 숭덩 숭덩 빠진 잇몸 같았다.

 

그 다음 다다른 곳은 정독 도서관이다. 우리나라 도서관 1번지 일게다. 그 옆에는 서울시교육청전시장이 있었다. 지금은 옛날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안내에 아이들이 일정에 없었지만 보고 싶다고 해서 들어갔다. 일제식 건물이었다. 특유의 빨간 벽돌로 지은 그래서 한 눈에 알아보게 하는 그런 형태였다. 실내에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교과서가 전시 되어 있었고, 교실도 1/4정도로 축소되어 있어서 난로에 도시락도 얹혀 있고, 옛날 책걸상이어서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처럼 해보자고 해서 해보니 우습다. 교훈과 급훈이 걸려 있고, 교단이 있고, 풍금이 있었다. 내 어릴 적 교실 풍경과 같은 모습에서 진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자기 엄마 아빠들 세대에서 공부했음직한 교과서를 찾아보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가장 신기해 한 문방구를 보며 십리사탕 눈깔사탕에 대해 물어봐서 이야기 해주었더니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너무 많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나 보다.

 

그 다음은 골목길을 따라서 티벳박물관을 갔다. 박물관이라기에는 너무도 옹색하고 초라했다. 규모도 엄청나게 작았고, 소장품도 불상  몇 기와 의상들이 전부였다. 2층으로 가파른 곳에 올라가니 의상들만 전시 되어 있고, 물건들도 조금 있기는 했지만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될 규모였다. 더구나 앞에는 티벳 물건을 파는 상점이 있어서 더 이상한 구조였다. 그런데도 관람비가 2천원이어서 아이들이 너무 억울해 했다. 값 치고는 너무도 볼품 없고 설명도 해주지 않는 그런 이상한 곳이었다. 그 많은 것들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였겠지 싶으니까 더 정이 떨어졌다. 그리고 내가 가본 몽고에서 본 의상들과 비슷해서 반갑기도 했다.

 

아이들이 투덜거려서 떡볶이와 어묵으로 간식을 사주었지만 안 먹는 녀석도 있고 날이 너무 푸근해서 어묵 국물이 맹숭하여 맛이 덜했다.

그 다음 들른 곳은 세계장식구박물관이었다. 여기는 들어가는 문이 철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가의 물건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관람비도 3천원으로 최고 비쌌다. 더구나 다행인 것은 해설사가 은발의 신사였는데 아주 자상하게 설명을 해줘서 아이들이 계속 탄성을 질렀다. 엄마에게 선물해주고 싶다고 고른 물건이 아이들 값에 맞지 않게 몇 십만 원이었다. 너무 고가여서 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팔찌와 발찌, 코걸이, 황옥, 에메랄드, 묘족이나 인더스 산맥에서 살던 이들의 장식품들이 주를 이뤘다. 모자, 목걸이 등이 휘황찬란했다. 더구나 금시계 은보석 팔찌, 각종 보석 장신구들이 줄을 이뤘다. 더구나 핸드백전시회를 하고 있어서 18세기부터 볼 수 있어서 새로웠다. 옛날 귀부인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녔던 장신구 걸이는 백제시대 허리띠만큼 화려하고 독특했다. 향수병부터 시작해서 거울, 지갑, 손칼, 보석함까지 매달린 것이 아주 새롭게 다가왔다. 아이들은 너무 예쁘다를 감탄하면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과연 이 부분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효과가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아이들이 비싼 가격에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었으니까.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계속 걸어서 다음 행선지까지 가겠다고 했더니 입이 댓발이다. 가회박물관을 찾아가는데 재동초등학교를 끼고 올라가야 하는 것을 방향을 잘못잡아서 되돌아 나왔더니 한마디가 아니라 열마디도 더했다. 늦어서 미리 전화하고 서둘러 갔다. 가다보니 카돌릭수녀회연수원이 아주 넓은 장소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에 비해 가회박물관이나 매듭, 자수 박물관의 규모는 한옥 한 채 수준이어서 비교가 되었다. 가회박물관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는 해설사가 민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아주 잘해주었다. 그 곳에서 말로만 듣던 ‘지두화’를 볼 수 있었다. 작품성은 많이 떨어지지만 서민들이 손가락으로 물감 찍어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 더 마음을 끌리게 했다. 십장생도, 모란꽃 병풍, 호랑이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 문자도 병풍, 산수화 병풍 등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었고, 따끈한 차 대접까지 받아서 아주 좋았다. 마음이 스르르 녹는 것 같았다. 한옥에 들어서니 너무도 편안한 마음이어서 더 늙으면 꼭 한옥에서 살겠다는 각오를 하게 했다. 그리고 북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에서 한옥이 나오면 사서 임대를 해주고 리모델링 해서 이렇게 우리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작은 박물관들을 계속 만들고 있단다. 좋은 일이다. 밖으로 나와서 아이들이 모두들 체험활동으로 부적을 하고 싶다고 해서 여러 가지 중에 골라서 했다. 대부분 공부 잘하는 부적을 택했지만 건강을 택하는 아이도 여럿이었다. 빨간 봉투도 인상 깊었고, 체험할 수 있는 꺼리를 갖고 있어서 더 좋았다. 체험비가 개인당 3천원 이었다. 그러면서 해설사가 일 년에 한 두 번 선생님 같은 분들이 오신다면서 반가워 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지금 한글로 말하고 있지만 영혼은 한국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아이들은 국적불명의 불쌍한 아이들이다. 이렇게 우리의 것을 체험하게 하고 보고 느끼게 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옆에서 자기들은 한국사람 맞는단다. 내 말 때문인지 그 다음부터 식사는 아이들이 모두 한식으로만 한다고 해서 속으로 웃었다. 

 

아이들이 해가 지기 시작하자 집으로 가잔다. ‘꽃보다 남자’를 봐야 한단다. 그게 연속극인데 요즘 인기 절정이란다. 뭔지 모르지만 좀 그랬다. 그래서 자수 공방을 가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 못 가고 나오는 입구에 있던 매듭공방에 들렀다.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곳간 열쇠꾸러미 매듭은 놀라웠다. 조개에 매달린 열 개 정도의 형형색색의 매듭이 너무 아름답고 자연스러웠다. 모두 손으로만 가능한 매듭은 조선시대만 해도 술 만드는 사람, 매듭 엮는 사람, 연결고리 만드는 사람 등으로 철저하게 분화되어 발전되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는 하려는 사람이 적어서 혼자 다 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매듭으로 만든 상품을 파는데, 엽서, 거울, 귀걸이, 목걸이, 팔찌, 브로치, 등 다양한 용도로 발전 진화하고 있었다. 외국 사람들에게 선물할 거리로 좋을 듯해서 엽서 10장과 귀걸이를 샀더니 아이들이 역시 하면서 장신구에 관심을 보였다. 모두 손으로 매듭을 만든 것이라서 앙증맞다. 물건을 샀다고 관람비가 천원이었는데 면제를 해주셨다. 고마웠다.

북촌 체험하기는 시간이 6시가 넘어가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안국역을 찾아가는 길에 헌법재판소가 있어서 길 건너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인사동까지 걸어갔다. 인사동 구경을 여기 저기 하면서 아이들에게 기념으로 누비 필통들을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 이번 여행에 참가하지 못한 재현이가 생각이 나서 하나 골라두었다. 아이들은 신나했다. 개인 시간 좀 달라고 해서 20분 넘게 주었더니 다들 시간 지켜서 모여 있었다. 예인이만 떨어져서 함께 쌈지길을 올라가서 눈요기만 하다 내려왔다. 기표네서 먹을 간식으로 한과를 두 세트 샀다. 그랬더니 결국 하나는 도로 주셨다.

일곱시가 넘어가자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해서 한식집에 들어섰다. 3층까지 있는 집으로 규모가 컸다. ‘지리산’에는 데려가지 못했다. 너무 비싸서. 그런데 그 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아이들은 철판 스테이크 5, 철판 제육볶음 6, 칼국수 1을 시켰는데 꽤 비쌌다. 반찬을 먹어보니 정갈하고 맛이 있었다. 특히 김치가 시원했다. 한옥을 리모델링 한 곳이어서 좀 기이했다. 더구나 한옥이라는 이미지가 중국풍으로 느껴질 정도로 좀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이 배를 두르리며 기표네 집으로 갔다. 기표 아빠도 계셨다. 우리 보고 다른 곳으로 잠을 주무시러 가신다고 하셔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황송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우리 온다고 간식을 상다리 부러지게 장만 해놓으셨다. 귤, 카스테라, 인절미, 음료수, 맘모스 빵, 파인애플 등이 흘러 넘쳤다. 결국 씻고 간식 먹고 이야기 하다 아이스크림 내기 윷놀이를 여자대 남자로 패를 갈라서 했는데 3승 2판으로 여자팀이 이겨서 기표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밤 11시 넘어 아이들과 우르르 나갔다가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자정까지 놀다가 잠이 들라고 하고 기표 동생 기정이 방에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더웠다.

 

아침 8시에 깨우겠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간밤에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 같았는데 모른 척 해주었다. 여자들 6명은 안방에서 자고, 남자들 5명은 거실에서 잤다. 밤새도록 놀까봐 걱정했는데 장난 전화 문자를 주고받으며 놀다가 두시 넘어서야 모두 잠이 들었단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가 알람에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은 내 부스스한 모습에 마구 웃었다.

아침은 떡국이라더니 미역국으로 진수성찬이었다. 김, 깻잎 짱아찌, 낙지 삶아 저민 것, 호박전, 시금치나물, 계란말이, 무우말랭이 무침, 소고기 불고기가 정점이었다. 국에 말아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든든하게 먹고 10시에 서울 고등법원 견학에 맞추느라 9시 10분에 집을 나섰다. 길 안내는 물론 아이들 전쳘표와 아이들 간식 사서먹이라고 봉투까지 주셨다. 내내 뿌리치다가 감사하게 받아서 아이들 간식과 점심값에 보태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용이 과다해서 걱정을 했는데 감사할 일이다. 기표가 나와 연락을 자주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나 역시 제 잘난 맛에 은사님들 찾아가는 것은 나중에야 생각을 했다니까 웃으신다.

 

서울고등법원 421호 법정은 우리 동지들이 자주 가는 곳이다. 우연히도 그 곳이 배정이 되어 앉아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10일에 있을 동지들 선고 공판도 여기서 이뤄질텐데 싶으니까 더 그랬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내가 법정에 자주 오는 것을 의아해 하여서 이러저러해서 온다니까 알아듣겠는 모양이다. 그 말 때문에 법정에 서면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던 부분에 틈을 준 셈이다.

서울고등법원은 시시 했다. 판사와의 대화 시간에 황병호(이름이 긴가민가하다) 라는 고등법원 판사가 나왔다. 아주 젊었다. 수원에서 온 1학년 아이들과 섞이어 다녔는데 아마 그 학교에서 미리 질문지를 보냈나 보다. 질문 내용은 판사가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 판사로서 보람은 뭔가, 판사가 되는 길은 어떤 것이 있나 따위였다. 그래도 성실하게 1학년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줬다. 큰 애기가 2학년이라고 했다. 로스쿨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범죄인의 초상권에 대해 조심스런 찬성 쪽이었고, 자기 자식 공부에 대해서는 우물쭈물이었다. 아이들이 건강하려면 자기도 시골에서 자라서 공부를 고 2 올라가서 했다면서 요즘 아이들 걱정을 했다. 너무도 과도하게 시킨다고 하면서도 자기 아내 의견에 반하지 못하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 역시 보수구나 싶었다. 괜히 유럽식 어쩌구 떠들은 내가 무색해졌다. 수첩하나 기념품으로 받았다. 시간이 애매하게 11시 반에 끝이 나서 일단 KBS방송국에 가기로 했다.

 

 너무 복잡했다. 약수에서 갈아타고 공덕에서 또 다시 갈아탄다음에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신관으로 갔다가 퇴짜를 맞고 본관으로 갔더니 예약이 안되어 있다고 해서 남의 팀에 끼었다가 설명도 제대로 못 듣고 구박만 받았다. 그러는데 기표가 왔다고 연락이 와서 데리러 갔는데 그 때서야 내가 신청한 것을 알고는 황급하게 불렀다. 그래서 다시 보는 것으로 했다. 기표도 별관에서 신관으로 다시 본관으로 오면서 많이 지쳤는 것 같았다. 5층까지 올라가서 내려오면서 설명 듣는 것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였나 보다. 괜히 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엣날 건물이어서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군데 군데 캐릭터를 설치해서 설명 들으며 쉬게 해서 지루하지 않게 했다. 아이들은 기상케스터가 되어 보기도 하고 9시 메인 뉴스 앵커 노릇도 해보았다. 효과음도 들어보고, 입체 영상물을 편광 안경을 끼고 관람도 했다. 그래도 아이들 수준에는 시시 했나 보다. 더구나 실제 진행하는 라디오 진행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환호하고 연애인 한 명을 발견하고 싸인 받겠다고 비명지르며 달려가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점심이 3시였다. 본 비빔밥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보리비빔밥 2, 야채비빔밥 1, 낚지 비빔밥 6, 소고기 볶음 비빔밥 1, 김치 무침 비빔밥 2 등을 시켰다. 그런데 음식을 시키다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친한 애들끼리만 뭉쳐 다니는 꼴에 화가 났던 거다. 그리고 결국 남자 몇 녀석은 거리에서 야단을 맞아야 했다. 용변이 급하다는 아이를 함께 가지 않고 지내끼리만 다녀와서 말이다. 그랬더니 한 녀석이 울었다. 내 마음도 나빴다. 그냥 조용하게 말해도 되는데 그 정황이 화를 참지 못하게 했다. 그 한 아이가 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아이여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지수가 놀랬단다. 학교에서만 소리치고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길거리에서 야단을 쳐서 말이다. 사람들도 다 쳐다보는데 그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다. 돌아보니 부끄럽다. 그냥 다가가서 알아듣게 말해도 되는데. 그 동안 지켜본 것이 한꺼번에 폭발을 한 셈인 것이다.

파리바게뜨에서 간식거리를 서둘러서 샀다. 한 시간 여유 가지고 나왔는데도 남은 시간은 5분이었다. 잘못하면 차를 놓칠 뻔 했다. 자리를 잡아 안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반 시간 두고 깨어났다. 5시 5분 차였는데 내려오는 내내 잠을 잤다. 아이들이 어찌 집에 가냐고 해서 지하철 타면 되는데 걷는 시간이 너무 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택시를 4명씩 두 대 태워서 보내고 예인과 예림이는 내 차를 타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어제 북촌 여행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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