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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촛불을 기억하십니까?

촛불을 기억하십니까?
임세환 기자 메일보내기

촛불시위는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저녁 불쑥 서울시내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의 무리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촛불은 꺼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촛불이 한창 타오르던 6월 말, 대학생들이 방학을 하는 7월이 되면 촛불은 더 거세게 타오를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물론 촛불은 7월에도, 8월에도 타올랐다. 그러나 촛불의 전성기는 6월이었다. 서울시내 아스팔트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직장인들이 휴가를 맞아 서울을 떠나면서,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일상은 갑자기, 그러나 조용히 다가왔다. 대학은 다시 개강을 했다.

촛불 이후의 대한민국

그 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13개의 금메달을 따며 세계 7위를 기록했다. 못 들어 올 것 같던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공기업, 공공기관 민영화, 통폐합 등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됐다. 부동산 규제도 완화됐다. 8월에는 이명박 정부의 종교차별에 뿔난 불교 승려들과 신자들이 촛불을 대신해 서울광장을 가득 매우는 일도 있었다.

정연주 KBS 전 사장은 결국 해임됐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는 공정택 후보가 강남 학부모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턱걸이 당선됐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이적단체 혐의를 받으며 국가보안법이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간첩 사건도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침공했다. 북한은 핵 불능화 조치를 중단했다. 일본은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기해 한일 간 독도 분쟁이 심화됐다. 태국에서는 사막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크게 벌어졌다.

100만 개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제2의 6.10 항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불과 2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은 다시 ‘신공안정국’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초대형 허리케인 구스타브가 중남미와 미국을 덮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을 때 ‘9월 위기설’의 공포가 한국을 엄습했다.

살기 힘든 나라, 대한민국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한국이 올림픽에서 7등을 하자 이명박 대통령의 747 공약 중 마지막 7이 이루어졌다고 떠들었다. 올림픽 7등이 경제대국 7등으로 둔갑한 것이다. OECD가 한국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2008년 기준 45.2시간으로 세계 최고라고 발표한 반면 한국의 노동부는 39.2시간이라고 발표했다. 홍준표 원내대표와 노동부의 발표를 종합하면 한국은 노동자들이 법정 노동시간(40시간)보다 적게 일하면서도 세계에서 7번째로 잘 사는 좋은 나라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의 마음에는 경제 위기에 대한 공포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주당 노동시간이 39.2시간이라는 발표는 한국의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지만 추석 물가에 대한 공포는 현실이다.

때문에 ‘9월 위기설’에 대한 공포 또한 현실감이 있다. 9월에 만기를 맞는 외국인 보유 채권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것이라는 ‘9월 위기설’은 10년 전에 이미 IMF 외환위기로 그와 같은 공포를 체험한 바 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위기설 자체가 진짜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투자 위축보다 소비 급감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계속되는 환율 급등세는 ‘9월 위기설’의 또 다른 요인이다. 달러 강세, 외국인 주식 매도에 대한 불안이 환율을 계속 끌어올리면 물가인상, 소비 위축은 불가피하다. 원/달러 환율이 1,100원을 돌파하면 소비자들의 심리적 불안은 하늘 높이 치솟을 게 뻔하다. 주식시장은 오랫동안 하락세에 놓여있고, 국내외에서 경기 둔화를 분명하게 암시하는 지표들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9월 위기설이 현실화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지금, 언제 폭발할지 모를 폭탄을 가득 안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촛불을 기억하십니까?

판도라의 상자에서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이 쏟아져 나온 이후에도 인간은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다.

촛불 이후의 대한민국은 사람들이 더 살기 힘든 나라로 나아가고 있지만 촛불을 통해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쇠고기의 국내 반입을 막아낼 수 있었다. 또 전기, 수도, 가스, 의료보험을 민영화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정부로부터 받아냈다.

촛불로 모든 불안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간직할 수는 있게 됐다.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