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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퇴진

[속보]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퇴진
이지선 기자
입력 : 2011-02-12 01:12:51ㅣ수정 : 2011-02-12 01:23:17

무바라크 전격 하야… 이집트는 자유다
이지선 기자
입력 : 2011-02-12 03:02:52ㅣ수정 : 2011-02-12 03:02:53
ㆍ“군에 권력 이양” 발표, 이집트 전역 축제분위기

카이로의 봄… 시민들 “우리가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지선 기자
입력 : 2011-02-12 03:08:58ㅣ수정 : 2011-02-12 03:08:58
ㆍ100여만명 시내 곳곳 깃발 흔들며 환호
ㆍ“꿈이 현실이 됐다” 시민혁명 성공 자축

무바라크의 ‘반전 드라마’… 퇴임거부서 굴복까지 1박2일
김기범 기자
입력 : 2011-02-12 03:09:25ㅣ수정 : 2011-02-12 03:09:25
ㆍ희망에서 절망, 다시 희망으로

실권 쥔 이집트 군부 어디로?
서의동 기자 phil21@kyunghyang.com
입력 : 2011-02-12 03:02:20ㅣ수정 : 2011-02-12 03:02:20
ㆍ민선정부에 실권 넘겨야 카이로의 봄 비로소 완성
ㆍ기득권 수호 개입 가능성도

미 “늦었지만 환영… 민주화 순조로운 진행을”
워싱턴 | 유신모 특파원
입력 : 2011-02-12 02:58:09ㅣ수정 : 2011-02-12 02:58:10
ㆍ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권력 장악엔 우려

전쟁영웅서 독재자로…노욕 못채우고 결국 ‘백기’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입력 : 2011-02-12 03:01:57ㅣ수정 : 2011-02-12 03:01:58
ㆍ막내린 무바라크 철권통치 30년
ㆍ재산 도피 등 위해 마지막까지 버틴 듯
ㆍ술레이만 정권 계승측면 지원 속셈도

물러난 ‘현대판 파라오’ 무바라크ㅣ연합뉴스
입력 : 2011년 02월 12일 02:07:06
비상계엄 통해 이집트 30년 통치… 중동평화 중재자 역할


[속보]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퇴진
이지선 기자
입력 : 2011-02-12 01:12:51ㅣ수정 : 2011-02-12 01:23:17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권력을 군에게 넘겨주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고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밝혔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시작된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18일째인 11일(현지시간) 마침내 30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수도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시위 개시 이후 최대규모인 100여만명의 인파는 무바라크의 사퇴소식에 접하고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수백명의 군인들이 시민들과 한데 뒤엉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환영했다.

앞서 이집트 군부는 이날 두번째 최고지휘관회의를 연 뒤 무바라크 대통령이 전날 밝힌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로의 권력이양과 9월 대선 때까지 현 체제 유지 방안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2차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코뮈니케는 이어 “현 상황이 종료되는 대로 비상계엄령을 철폐하겠다”고 밝혀 시위가 잦아들지 않는 한 계엄령을 유지할 뜻을 분명히 했다. 군부는 또 국가안보 위협을 경고하면서 시위대에 일상 복귀를 촉구했다.

하지만 군 수뇌부의 무바라크-술레이만으로 이어지는 현체제 지지발언은 적지 않은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날 무바라크는 가족들과 함께 홍해변의 휴양도시 휴양도시 샤름 엘 셰이크에 도착했다고 외신들은 일제히 타전했다. 여기에는 사미 하페즈 에난 육군 참모총장이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바라크는 앞서 10일 대국민 TV연설을 통해 “오는 9월 대선까지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 권익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기로 결정했다”면서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오는 9월까지 권력을 점진적으로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외부의 강권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즉각적인 권력이양 요구에 정면으로 맞섰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발은 무바라크-술레이만-군부가 얽힌 기성 권력을 뒤집었다. 수도 카이로에서는 이날 오전부터 시민 수십만명이 시내 6곳에서 개별집회와 금요예배를 한 뒤 미리 예고한 ‘100만 항의 시위’를 벌이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으로 속속 집결했다. 시위대는 12일까지 전국적으로 ‘2000만 이집트인 행진’을 벌일 것이라고 공표했다.


무바라크 전격 하야… 이집트는 자유다
이지선 기자
입력 : 2011-02-12 03:02:52ㅣ수정 : 2011-02-12 03:02:53

ㆍ“군에 권력 이양” 발표, 이집트 전역 축제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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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이로 시민들이 11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카이로 | 로이터연합뉴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노욕도 결국 분노의 민주화 시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시작된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18일째인 11일(현지시간) 마침내 30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이날 TV연설을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권력을 군에 넘겨주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 이집트 군 최고지휘관회의는 곧 내각 및 상·하원을 해산하고 헌법재판소장과 함께 국정을 운영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이에 따라 군 최고지휘관회의를 주재하는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과 사미 하페스 에난 참모총장 등 군 지도부가 오는 9월 대통령 선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게 됐다.

수도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숨죽이며 술레이만 부통령의 긴급발표를 기다리던 시위대는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시위 개시 이후 최대규모인 100만명 이상의 인파였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수십만명의 군인과 시민들이 한데 뒤엉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환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이날 무바라크 퇴진에 대해 “이집트와 중동 역사의 중추적인 순간”이라며 “이집트의 이행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하야 발표에 앞서 가족들과 함께 홍해의 휴양도시 샤름 엘 셰이크로 이동했다.

앞서 이집트 군부는 이날 발표한 두 번째 코뮈니케에서 “현 상황이 종료되는 대로 비상계엄령을 철폐하겠다”고 밝혔다. 군부는 또 헌법개정과 함께 자유롭고 공정한 대선을 보장하겠다고 밝히고 국가안보 위협을 경고하며 시위대에 일상 복귀를 촉구했다.


카이로의 봄… 시민들 “우리가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지선 기자
입력 : 2011-02-12 03:08:58ㅣ수정 : 2011-02-12 03:08:58

ㆍ100여만명 시내 곳곳 깃발 흔들며 환호
ㆍ“꿈이 현실이 됐다” 시민혁명 성공 자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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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이 11일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퇴 소식을 전하는 보도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카이로 | AP연합뉴스

“이집트는 이제 자유다.” “우리의 혁명이 성공했다.”

이집트 시민들이 보여준 18일간의 투쟁 결과였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수십만명의 시위대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 시민혁명의 성공을 자축하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금요예배 직후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자며 광장으로 몰려들어 ‘100만명 항의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이집트 혁명’의 순간을 함께 누렸다.

대통령궁과 국영방송사를 둘러싸고 있던 시위대도 이집트 국기를 흔들면서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내각과 국회 건물 앞에서도 시위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승리의 분위기로 한껏 고무됐다.

카이로 거리는 대형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공중을 향해 총이 발사되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가 하면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리는 등 퍼레이드의 장으로 변신했다.

시민들은 “우리가 역사를 만들었다”며 환호했고 “꿈이 결국 현실이 됐다”고 외쳤다. 타흐리르 광장 시위에 참석한 셰리프 엘 후세이니는 로이터통신에 “내 인생에 무바라크가 아닌 다른 대통령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아무도 이집트 국민을 막을 수 없다. 이집트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환호는 카이로뿐만 아니라 이집트 전체를 흔들었다.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상 최대규모의 시위참가자들도 무바라크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0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반정부 시위를 벌인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탄타, 수에즈, 이스마일라, 마할라 등 전국 각지의 시위대는 거리로 쏟아져나와 축하의 물결을 이뤘다.

한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시위대가 대통령궁으로 몰려들고 있는 가운데 저격수들이 건물 옥상에 배치돼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무바라크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자 분위기는 180도 반전됐다.

이집트 반정부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구글의 중동·북아프리카 마케팅 매니저 와엘 고님은 트위터에 글을 올려 “범죄자가 대통령궁을 떠났다”며 이집트와 시민들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그는 이어 “진짜 영웅은 타흐리르 광장으로 쏟아진 이집트 젊은이들과 그 나머지 이집트 사람들”이라며 시민들을 치켜세웠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무바라크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이집트가 수십년간의 압박에서 해방됐다”며 “아름다운 정권이양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은 “향후 상황에 대한 국가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무바라크의 퇴진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타흐리르 광장에는 절망과 분노로 가득했다. 시위대는 이집트군이 전날 무바라크가 밝힌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로의 권력이양을 지지하면서 시위대의 일상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무바라크와 군부가 모두 우리를 속였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무바라크의 연설과 군부의 두 차례 코뮈니케(성명)는 이 같은 기대를 모두 저버리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현장의 군인들을 향해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켰다”며 군부를 비판하기도 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시위대는 이날을 기존의 ‘희생자를 위한 금요일’ 대신 ‘도전의 금요일’ 또는 ‘(무바라크와의) 작별의 금요일’로 명명해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시위 도중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 이날 시위에 참석한 한 어머니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둘째 아들도 희생양으로 기꺼이 내놓겠다”고 절규했다. 일부 군인들은 시위대의 행렬에 동참하기도 했다. 타흐리르 광장에 배치된 군인들 가운데 500여명은 시민들과 연대 운동을 벌이며 시위대 행렬에 합류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11일 다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환호의 순간을 목도할 수 있었다.


무바라크의 ‘반전 드라마’… 퇴임거부서 굴복까지 1박2일
김기범 기자
입력 : 2011-02-12 03:09:25ㅣ수정 : 2011-02-12 03:09:25

ㆍ희망에서 절망, 다시 희망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다시 희망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시위대의 즉각 사퇴 요구에 굴복하기까지 1박 2일은 반전이 거듭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대는 물론 전 세계가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를 예상한 것은 10일 저녁이었다. 이날 오후부터 이집트 군부와 집권 여당이 무바라크 하야를 예고하는 발언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특히 군부와 집권 국민민주당(NDP)이 무바라크의 하야가 임박한 듯한 발언을 내놓은 직후 이집트 국영방송이 무바라크의 대국민 연설을 예고한 것이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무바라크의 하야 기대로 이날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시위대의 규모는 순식간에 수십만명으로 불어났다. 승리를 확신한 시민들은 축제 분위기를 자아냈고, 외신들은 무바라크의 하야가 예상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수장의 무바라크 하야 예상 발언은 무바라크 하야를 기정사실로 만든 또 다른 불씨였다.

무바라크 하야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이날 오후 이집트 군 고위간부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됐다. 알자지라방송에 따르면 타흐리르 광장에서 승리의 함성이 터진 것은 하산 알 로웨니 카이로 방위사령관이 시위대를 상대로 “당신들의 요구는 오늘 밤 모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선언한 오후 5시20분쯤이다.

군부는 오후 5시30분쯤 국영방송의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군이 국가를 수호할 것이며 시위대의 정당한 요구를 지원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군 최고지휘관회의의 ‘코뮈니케 1호’를 발표했다. 방송 뒤 무바라크 하야를 기대하며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드는 시민들은 급격하게 늘었다. 오후 6시쯤에는 미 CIA 국장 리언 파네타가 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무바라크가 하야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한 내용을 증언했다. 곧이어 이집트 국영방송이 무바라크의 대국민 연설을 예고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세계가 이집트의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해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이날 오후 10시45분에야 연설에 나선 무바라크는 사임을 거부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축제 분위기는 순식간에 절망과 한숨으로 뒤바뀌었다. 이집트 국민들의 분노는 결국 당초 금요예배 뒤 100만명의 항의시위가 예정된 11일 목표를 웃도는 군중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최대 규모의 시위로 폭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국민 연설에서 9월 대선 때까지 대통령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던 무바라크가 하야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정오 금요예배가 끝나면서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나온 인파는 대해(大海)를 이뤘다. 무바라크의 노욕이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마침내 오후 6시 술레이만 부통령이 무바라크의 하야 소식을 전격 발표하면서 무바라크의 대국민 연설이 끝난 지 19시간 만에 다시 반전됐다. 1박2일 동안 이집트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실권 쥔 이집트 군부 어디로?
서의동 기자 phil21@kyunghyang.com
입력 : 2011-02-12 03:02:20ㅣ수정 : 2011-02-12 03:02:20
 
ㆍ민선정부에 실권 넘겨야 카이로의 봄 비로소 완성
ㆍ기득권 수호 개입 가능성도

무바라크는 갔지만, 군부는 남았다. 11일(현지시간)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전격 퇴진으로 향후 군부의 행보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군부가 약속대로 오는 9월 대선 때까지 상황을 관리만 하고 민선정부에 실권을 넘겨야만 ‘카이로의 봄’은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과 사미 하페스 에난 참모총장 등 군부인사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사태 추이에 따라 친무바라크 인사인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 대신 이들이 전면에 부상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군부가 과도정부를 장악함에 따라 이집트는 당분간 정상적인 행정체계보다는 군 최고지휘관회의에서 발표하는 ‘코뮈니케(성명)’가 일종의 포고령으로 작용하게 됐다. 일종의 군사정부다. 그동안 논의된 대로 헌법개정을 통해 자유로운 대선 및 총선 참여가 허용되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칠 경우 민선정부가 출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군이 기득권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개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집트 헌법 84조에 따르면 대통령 퇴진의 경우 국회의장이 대통령직을 잠정적으로 승계하게 돼 있다. 국회의장은 최장 60일 내 차기 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겨야 한다. 알 아라비야 TV는 그러나 군부가 3차 코뮈니케에서 상·하원을 해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술레이만 부통령은 무바라크의 하야 발표와 함께 군 최고지휘관회의가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혀 탄타위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이 과도정부를 이끌 것임을 분명히 했다. 술레이만 부통령의 역할은 아직까지 분명치 않다.

이집트 군부가 두 차례의 최고지휘관회의를 통해 마련한 정국해법은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지지를 표명하면서도 자진퇴위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시위대의 요구에 화답하는 ‘출구전략’이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무바라크가 이날 수도 카이로를 떠나 홍해 휴양도시 샤름 엘 셰이크에서 자진퇴임을 밝힌 것은 군부의 이런 정교한 출구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군부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무바라크가 사실상 권좌에서 퇴위하도록 유도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 경우 무바라크가 대국민 연설을 마치고 샤름 얄 셰이크로 떠나는 길에 동행한 것으로 전해진 에난 참모총장이 막판 설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부로서는 지난 30년간 충성을 바쳐온 무바라크의 명예퇴진이 향후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AP통신은 이집트군이 군사력과 홍보력을 적절히 활용해 국익의 최종 수호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부드러운 쿠데타(soft coup)’에 성공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미 “늦었지만 환영… 민주화 순조로운 진행을”
워싱턴 | 유신모 특파원
입력 : 2011-02-12 02:58:09ㅣ수정 : 2011-02-12 02:58:10

ㆍ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권력 장악엔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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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0일 미시간주 마르케트의 북미시간 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 이집트 상황에 대한 연설을 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마르케트 | 로이터연합뉴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결국 시위대의 사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1일 전격 사임을 발표함에 따라 미국은 이집트의 안정과 순조로운 민주화 이행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무바라크 사퇴에 따른 긴급 참모회의를 가진 뒤 무바라크의 퇴진 결정을 존중하며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이집트가 조속히 안정을 되찾아 9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로운 민주정부가 출범하는 일련의 민주화 과정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진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무바라크 이후 향후 권력 형성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미국은 10일 무바라크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사퇴를 거부한 것에 당혹감과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시위대의 거센 퇴진 요구에 굴복함에 따라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은 무바라크의 퇴진 거부 선언이 나온 직후 매우 긴박하게 움직이며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무바라크의 사임을 기정사실화하는 연설을 했다가 의외의 사태 전개를 맞은 오바마는 곧바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국무부는 이날 정례 브리핑도 취소하며 대외적 메시지 관리에 신중을 기했다.

오바마는 회의가 끝난 뒤 “이집트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했던 구체적 개혁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며 비상계엄을 즉각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이집트 시위 사태가 벌어진 뒤 가장 높은 수위의 비난 발언이었다.

미국은 무바라크가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경우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주도하는 ‘점진적 권력이양 작업’을 지지하고 이를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미국은 무바라크의 사퇴 거부 선언 직후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이집트에 대한 지원과 군사적 지지를 중단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등 무바라크 압박에 총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졌다.

무바라크는 결국 시위대와 미국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미국이 이집트 권력 핵심층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집트 최고 지도부의 행동을 전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력에서도 한계를 보였다. 특히 이집트 반정부 시위 초기 전개 양상을 미리 예측하지 못해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미 정보기관에 대한 신뢰는 더욱 떨어질 전망이다.


전쟁영웅서 독재자로…노욕 못채우고 결국 ‘백기’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입력 : 2011-02-12 03:01:57ㅣ수정 : 2011-02-12 03:01:58

ㆍ막내린 무바라크 철권통치 30년
ㆍ재산 도피 등 위해 마지막까지 버틴 듯
ㆍ술레이만 정권 계승측면 지원 속셈도

그의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붙은 지 30년. 11일 호스니 무바라크(82)는 이제 더 이상 ‘이집트 대통령’이 아니다.

무바라크는 전날 그동안 대통령으로서 업무수행을 할 때처럼 ‘트레이드 마크’인 군청색 양복과 검은색 넥타이 차림으로 TV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9월 대통령 선거까지 임기를 채우겠다고 마지막까지 고집했다. ‘전쟁영웅’에서 ‘독재자’로 몰락한 무바라크는 결국 시민들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28년 나일강 삼각주의 미누피야 지역에서 태어난 무바라크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 69년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뒤 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듬해 부통령으로 정계에 데뷔한 된 그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81년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자 권좌에 올랐다. 긴 독재의 시작이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사망으로 쉽게 권력을 쥐었지만 정통성 부재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게 됐다. 이 때문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친서방 외교정책을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야권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려 애썼다.

03_20110202_0303.jpg11일 전격 사퇴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집권 4년째인 1985년 3월 13일 미국을 방문,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 AP연합뉴스

대내적으로는 억압정치와 경제 실정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지만 그의 뛰어난 외교술은 이집트로 하여금 아랍권의 맏형 역할을 해내도록 했다. 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어 미국으로부터 매년 약 20억달러의 막대한 경제·군사 원조를 받았다.

무바라크는 일처리에 빈틈이 없고 세부적인 사안도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이었다. 장시간 업무를 보는 것이 비일비재해 ‘불도저’라고 불렸고 프랑스 치즈 광고에 나오는 ‘웃는 소’를 닮았다며 부통령 시절 주민들은 치즈를 구입할 때 “부통령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집권 기간 에티오피아 방문 중 벌어졌던 암살 기도 등 총 6번의 암살 위기를 모면한 무바라크는 주로 카이로 대통령궁이나 홍해변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에 머물면서 외부와 격리된 삶을 살았다.

뉴욕타임스는 무바라크가 퇴진을 거부한 것을 두고 “자신만이 이집트에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강력한 자부심과 뿌리깊은 혐오감이 이집트 위기의 중심 무대를 차지하게 됐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10일 대국민 연설에서 퇴진을 암시조차 하지 않았던 그는 하루도 안돼 백기를 들었다. 불과 19시간이 지난 즈음 샤름 알 셰이크에서 술레이만 부통령의 하야 발표를 들어야 했다.

무바라크가 마지막 순간까지 버틴 것은 ‘퇴임 이후’를 준비하기 위함으로 보인다는 관측이다. 퇴임 이후에도 과거 권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술레이만이 정권을 ‘계승’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무바라크가 물러나면 야권이 급부상할 가능성이 있고, 시위대가 더 큰 개혁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술레이만도 당장 무바라크를 배신할 수는 없다.

무바라크의 집착은 이집트의 ‘점진적인 권력이양’을 촉구해온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가들의 구미에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시종 “이집트의 급격한 변화는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입장이었으며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민주화 시위 초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에서 “미국이 이집트 원조를 중단하면 사우디가 대신할 것”이라며 역성을 들었다.

모아놓은 재산을 지키는 데도 대선까지 7개월의 시간이 절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가디언의 지난 4일 보도에 따르면 700억달러(약 78조원)에 달하는 무바라크 일가의 재산 중 일부가 스위스와 영국 은행 비밀계좌에 예금돼 있다. 무바라크는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연설이 된 10일 대국민 국영TV 연설에서 “훗날 역사가 나를 평가할 것”이라며 “나는 조국과 이집트 국민을 위해 30년간 봉사했다”고 말했다. 무바라크의 퇴진으로 이집트 현대사에서 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일으킨 군사혁명의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 이집트 사태 일지

1월17~18일 = 튀니지 시민혁명 영향으로 이틀 새 3명 분신

1월25일 = 무바라크 퇴진 및 대규모 시위 시작. 시위대 3명, 경찰 1명 등 4명 사망

1월28일 = 금요기도회 직후 전국 시위로 경찰과 충돌, 최소 26명 사망, 엘바라데이 가택연금.

1월29일 = 무바라크 대통령 내각 해산과 정치개혁 천명

2월1일 = 이집트군 “시위대에 무력사용 않겠다” 선언

2월2일 = 미, 엘바라데이와 첫 접촉…정부 특사 급파, 최대 반정부 시위 100만명 행진, 무바라크 “차기 대선 불출마”

2월7일 = 정부·야권, 개헌위원회 설치 등에 합의

2월10일 = 무바라크 대국민 연설 “오는 9월까지 권력이양” 조기사퇴 거부

2월11일 = 이집트군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권력이양 지지” 발표

술레이만 “무바라크 사퇴 결심, 군에 권력이양” 발표


물러난 ‘현대판 파라오’ 무바라크ㅣ연합뉴스
입력 : 2011년 02월 12일 02:07:06
 
비상계엄 통해 이집트 30년 통치… 중동평화 중재자 역할

`현대판 파라오'로 불린 호스니 무바라크(82) 이집트 대통령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 속에서 11일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섰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집트 시민들의 시위가 대규모 벌어지자 오는 9월 치러지는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하고 명예롭게 물러나는 길을 모색했으나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국민의 퇴진 압박을 견디질 못하고 끝내 낙마했다.

공사를 졸업한 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무바라크는 1969년 공군 참모총장에 올라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참패한 이집트 공군을 재건한 뒤 1973년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초기단계에서 이스라엘군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여 이집트의 전쟁영웅으로 부상했다.

무바라크는 이런 명성을 발판으로 1975년 안와르 사다트 정부의 부통령으로 임명된 뒤 1979년에 집권 국민민주당(NDP)의 부의장에 선출됨으로써 사다트의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아랍권 국가 중 최초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던 사다트가 1981년 10월 이슬람주의자 장교의 총탄에 암살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는 사다트의 암살 이후 불안정한 정국을 비상계엄법으로 통제했고, 현재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비상계엄법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정권안보의 도구로 활용됐다고 이집트 야권 세력은 주장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여당 후보의 출마가 제도적으로 어렵도록 한 선거법을 바탕으로 5차례 연임에 성공하며 30년간 권력을 휘둘렀으며, 2002년에는 차남인 가말을 집권 국민민주당의 핵심 요직인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임명, 부자간 권력세습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아왔다.

국내 정치에서 독재 권력을 휘둘러왔던 무바라크는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로 아랍연맹에서 퇴출된 이집트를 1989년에 다시 가입시키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는 등 중동평화를 위해 큰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3월 독일에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한때 건강 이상설에 휘말렸던 무바라크는 82세의 고령에도 주변국뿐 아니라 미국까지 방문하는 국외순방 일정을 소화하며 건재를 과시했으나 연초부터 튀니지에서 불어온 민주화의 폭풍에 좌초하고 말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