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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위하여

김진숙동지와 트윗터 인터뷰

* 글을 어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인터뷰는 2011년 1월 25일부터 2월 6일까지 열흘 남짓 트위터로 진행됐다. 인터뷰 원고를 게재하려는 지금은 김진숙 지도위원 - 이하 김 지도로 줄이겠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메일을 받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보낸 이에 '김 지도'라고 뜬다. 어딘가 정겨운 호칭이어서 이대로 써 본다. - 이 크레인에 올라간 지 38일째 되는 날이다. 15년 넘게 인터뷰 원고를 써왔는데, 이처럼 결말이 열린 채로 글을 써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김 지도는 트위터 인터뷰가 끝나고 이틀 지나서 트위터 계정을 없애 버렸고, 하루 한 끼 도르래로 올리던 음식도 끊었다. 프롤로그를 달고 있는 현재는 2월 14일로 예정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단행 직전 주말이다. 머리가 빙빙 돈다. 현장에서 크레인 밑에 그물을 치자는 말이 돈다는 것을 알고 난 직후여서다. 김 지도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크레인에 올라갔는지를 조금이라도 알리자는 생각에 흩어진 조각들을 두서없이 모았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인터뷰

 

김진숙과의 인터뷰. 도저히 인터뷰로 담을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려니 애초부터 망설임이 컸다. 무엇보다 김 지도는 나보다 글을 잘 쓴다. 김 지도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애먼 내가 나설 필요가 없지. 그런 그가 35미터 크레인 위에 있는 틈을 타 평소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인터뷰를 청했다. 차디찬 부산의 고공에서 내리는 말들이 서울의 따뜻한 방구석으로 떨어질 때마다, 그 송구한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이 인터뷰는 따옴표 안에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만 찬찬히 읽고 넘겨도 충분할 것이다.

 

'안 울고 주익 씨를 편하게 떠올리고 싶어'

 

'김주익 열사가 생을 마감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김진숙이 올라갔다.' 연초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사람들의 등을, 머리를 따가운 죽비로 내리치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가 속한 현실은 여기 이대로 있는데, 왜 잊고 지내느냐고 한파보다 더 매섭게 온 몸을 쨍하게 강타하는 소식. 당사자인 김 지도는 한 시간 넘게 쇠고리를 자르고 자물쇠 자르면서 보는 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단다. 새벽이라 사람도 몇 명 없었고 사람들은 앞만 보지, 위를 보며 걷지는 않더란다.

 

- 크레인 아래 있는 사람들은 지도위원의 건강 상태와 지금의 심경이 제일 궁금합니다.

"부산엔 96년만이라는 추위가 침공했었는데 감기도 안 걸리고 동상도 안 걸리고. 왜 이러는지 저도 그게 젤 궁금합니다. 심경은 아무것도 못하고 걱정하고 고민할 때보다 마음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 지도는 날이 하도 추워 사과가 폭탄이 됐다, 크레인을 개조해 로봇을 만들 계획이다 하며 끊임없이 밝은 모습을 보여 왔다. 1월 19일 부산지방법원은 한진중공업 측의 퇴거 요청을 김 지도가 받아들일 때까지, 하루 100만 원을 내라는 간접강제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때도 역시 김 지도는 100만 원짜리 방에 묵어본 사람 있느냐며 끄덕도 하지 않았다.

 

- 거기 계시면서도 저희를 웃기고 계십니다. 문제는 지도위원께서 웃건 울건 보는 사람들은 울게 된다는 거죠. 특유의 낙천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크레인에서."

 

- 크레인에 들어가기 위해 한 시간 넘게 자물쇠를 자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때의 마음과 크레인 방안에 딱 들어섰을 때의 감회는 어떠셨을까요?

"2003년 이후 사측이 노력했다는 게 확 와 닿는 게 크레인에 대한 경비가 엄청 강화됐어요. 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이중의 잠금장칠 해놨더군요. 훤한 불빛아래 사람도 한둘씩 지나다니는데 다행인 게 사람이 앞을 보고 걷지 위를 보는 사람은 없대요. 쇠고리랑 자물쇠 자르고 문을 여니 철문이 '꺼엉~' 열리는데 다행히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 없었고. 안에서 문 잠그고 올라와서 조종실 문 열어보고 젤 먼저 든 생각. 주익 씨가 여기 있었구나."

 

- '김주익'이라는 이름이 나와서 이 얘기 먼저 해야겠네요. 그 이름이 아파서 8년째 겨울에도 보일러를 못 틀고 지내셨다면서, 그 크레인에 본인이 올라가셔야 했나요? '김진숙', '85호 크레인'이라는 말만 듣고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 철렁했습니다. 왜 35미터 고공이 지상보다 더 편하십니까?

"보일러 틀고 살려고, 안 울려고, 친했던 중학교 동창처럼 편하게 김주익, 곽재규 떠올리며 살고 싶어서... 자본은 2003년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놨는데 주익 씨가 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니 이 크레인이더라고요. 그래서 맘이 편한 거겠죠."

 

2003년 고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지회장은 129일 동안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을 했다. 그는 대답 없는 회사에 항의하며 목을 맸고, 2주 뒤 곽재규 열사가 도크에서 투신을 했다. 회사 측이 65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시작된 파업, 그리고 한진중공업 사측의 단체교섭 거부와 손해배상, 가압류, 고소, 고발 등이 이어진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진중공업 조합원 아니면 살 이유 없는 사람'

 

김주익 열사는 사측이 2년 투쟁의 결과로 이끌어낸 노사합의를 뒤집은 날 크레인에 올랐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1월 6일(목)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크레인에 올라갔다. 그 편지 한 통에 크레인에 올라간 이유가 담겨 있다. '지난 2월 26일, 구조조정을 중단하기로 합의한 이후 한진에선 3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잘렸고, 설계실이 폐쇄됐고, 울산공장이 폐쇄됐고, 다대포도 곧 그럴 것이고,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 당했습니다. 명퇴 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 손규열 두 분이 같은 사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400명을 또 자르겠답니다. 하청까지 1000명이 넘게 잘리겠지요. 흑자기업 한진중공업에서 채 1년도 안된 시간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그 파리 목숨들을 안주삼아 회장님과 아드님은 배당금 176억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정리해고 발표 다음 날.'

 

한진중공업은 1월 12일 부산고용노동청에 2월 14일자로 생산직 노동자 290명을 정리하겠다고 신고해 놓은 상태다. 한진중공업에 스물한 살 여성 최초 용접공으로 입사해 스물여섯 살에 해고된 후 다시 그만큼의 세월인 26년 동안 복직 투쟁을 해 온 노동자, 그 사람이 김진숙이다. 복직 투쟁 했다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징역과 수배 생활을 징하게 해 온 그가 자신은 '한진조합원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며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것이라며 기어이 크레인에 오른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그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여성사업장에 있다가 남자들만 있는 조선소에 오니 오히려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옛날부터 우리공장이 참 인간적인 유대가 끈끈했어요. 사람들이 딴 데보다 월급 적어도 그것 땜에 버틴다 할 정도로. 사람들이 참 순하고 착해요. 저는 노동운동에 대한 거창한 이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그냥 아저씨들이 너무 좋고. 그냥 너무 좋았어요. 두 다리 다 부러져 밥도 안 나오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주전자에 죽 들고 오시는 것도 아저씨들이었고 제가 해고된 지 27년이 지났고 그때 당시 아저씨들은 몇 분 안 계세요. 대부분 같이 일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죠. 근데 이 추운 겨울에 밤새워 크레인을 지키고 아이들 데리고 세배시키고. 옛날부터 끈끈한 뭐가 있었어요. 저를 강하게 붙잡고 있는 건 그겁니다."

 

정파 구도와 관료화 문제

 

-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자본이야 그렇다 치고... 상황은 똑같은데, 점점 더 무뎌지는 우리들(저 같은 사람들, 노동조합, 민주노총 등등)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으셨던 건 아닌지요?

"솔직히 그런 꿈도 있긴 했는데 이런 게 메시지가 되지도 못할 만큼 화석을 넘어 산화단계로 퇴화된 지도부들. 끊임없이 정파구도 속에서 매사를 파악하는 습성들을 유전자처럼 지니고 사는 간부들. 적은 별로 탄압 안 해요. 내부에서 다 탄압해주니까."

 

- 서울만 해도 재능교육, 발레오공조, 국민체육공단 등 밖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조 조합원들이 수두룩합니다. 지난 달 열린 민주노총 대대회가 상설연대체 건설 통과, 국고보조금 지원 방침에서 유회되면서 끝났습니다. 노동관계법 개정, 최저임금 투쟁에 앞서나가겠다는 내용도 있었고요. 민주노총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건 이른바 지도부들 결정이고 저는 민주노총을 지탱하고 끌고나가는 건 이 추운 겨울 곳곳에서 투쟁하는 재능교육, 홍익대, 발레오공조, 국민체육공단, 현대자동차 등의 노동자들이라고 믿어요. 민주노총이 위기라고 말하는 건 그 둘 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고 관료화를 질타하는 건 그 거리를 메우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비정규직을 책임지지 않는 민주노총을 혼쭐내는 발언을 기대했는데, 답을 보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전부해서 30문 30답으로 이뤄진 인터뷰 내내 김 지도는 우문에 현답을 했다. 나를 반성하게 하고, 내가 할 일을 찾게 만드는 내용들이었다.

 

- 전 추울 때 농성이나 집회가 최고 무서운데, 이놈의 날씨가 풀린다 풀린다 약만 올리네요. 김 지도도 무서운, 피하고 싶은 농성이나 집회가 있으신가요?

"추모제, 노동자장, 사망규탄집회. 그리고 '끕'들 많이 나오는 집회. 사람은 두세 명에 깃발은 이불 홑청만한 거 들고 와서 위원장님이라고 마이크잡고, 본부장님이라고 연설하고, 대표님이라고 연대사하고, 의장님이라고 격려사하고, 지부장님이라고 투쟁사하고, 지회장님이라고 경과보고 하고, 사무장님이라고 결의문 낭독하고... 이런 집회 좀 하지 맙시다, 제발! 대중들은 얼어 죽게 생겼는데 준비 하나도 안하고, 대회사․연대사․투쟁사 내용 똑같고, 나도 가기 싫은 집회를 조합원들이 오고 싶겠수."

 

- 앞으로 달라지길 바라는 점이 있다면, 자유롭게 얘기해 주세요.

"홍대에 배우 김여진 씨가 진정성을 가지고 연대하는 걸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민주노총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인데 우리에게 저런 진정성이 있는가. 마이크 잡을 때만 외치는 연대말고 정말 김여진 씨와 우당탕탕처럼 홍대 노동자들을 늘 생각하고, 그러다보면 틈만 나면 좇아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사람도 모이고 뭐가 되지 않겠어요. 막말로 민주노총 간부들이 투쟁사업장 한군데씩 판 깔고 앉아서 거기서 회의하고, 거기서 사람 만나고, 거기서 업무를 보다보면, 자연히 그쪽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하지 않겠어요. 문제는 민주노총이 그걸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는 거. 그게 절망입니다."

 

달라진 세상, 달라져야 하는 운동

 

- 과문한 저로서는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기도 한데요. 해고, 수배, 구속 등 갖은 일을 겪으신 27년간에 비추어 노동자의 현실은 어떻게 변화했다고 보시나요? 좋아졌나요? 나빠졌나요? 먼저 노동자의 처지는요?

"제가 운동 처음 시작할 땐 노동자들 중 집 가진 사람이 특권층일 정도로 생활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물론 반 이상은 은행 것이긴 합니다만, 대부분 집 있고 차도 있고. 문제는 비정규직들에게 가난을 물려줬다는 게 가장 아프죠."

 

-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공세는 어떻게 달라졌다고 보시나요?

"노동운동이 성장한 것 이상으로 자본의 대응은 훨씬 고단수였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통제를 한 게 가장 압권이죠. 정규직이 기득권처럼 돼버리면서 정규직은 그 자릴 지키는 게 우선이 돼버리고 비정규직들은 그런 정규직들을 비난하고."

 

- 노동운동을 둘러싼 인식은 나아졌나요?

"노동조합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던 시절에 비하면 눈물겹도록 발전한 건 사실인데 빨갱이의 자리에 철밥통이, 불순세력의 자리에 대기업 이기주의가 자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되기도 하고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노조가 만들어지는 걸 보면 노동자들에겐 노조만이 유일한 지주이고 바람막이인 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요구, 조합원들에만 한정된 활동들이 조합원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고 연대를 계급적 단결이 아니라 불쌍한 처지의 노동자에 대해 동정을 베푸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건 심각한 문제죠."

 

- 홍대 노동자는 300원짜리 밥 먹는다, 재능은 압류 당했다, 추운데 농성한다 등 불행을 팔아 동정을 사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난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계급적 단결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그게 현실이고 그게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출발일 수 있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못 나가는 거죠. 300원이 320원이 되고, 가압류가 풀리면 승리가 되고 다들 잊어버리는. 거기까지 가는 것만도 너무 힘겨우니까. 다시 한발을 내디디려면 끔찍하고."

 

-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게 옳은 걸까요? 따뜻하고 배부른 게 죄스럽다가도, 운동은 항상 가난하고 비참해야 하는 건지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저도 이게 좀 어려워요. 맛있는 걸 먹다가도 문득 목이 메고, 팝콘 봉지 들고 영화 보러 가서도 아는 사람 만날까봐 거시기하고, 개그 프로그램 보면서 낄낄거리다가도 죄책감 들고. 농성장에 있어야 맘이 편하고 공권력 투입되는 현장에 있어야 밥값 한 거 같고. 사실 제가 여기(크레인)서 이러고 있어보니까 누가 트위터에서 먹는 얘기하고 영화얘기 하고 그러면 배신감 들고 그래요. ㅋ 저도 건설동지들, 유창환경 동지들 투쟁할 때 할 짓 다하고 살았으면서. 할 짓 다하면서도 켕기지 않고 맛난 거 먹으면서도 목 메이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어요."

 

'진정성, 그리고 또 진정성'

 

한 번에 140글자라는 한계, 그것도 스마트폰으로 엉성하게 화면을 누르며 하는 대답이라고 믿기지 않는 답변들이 쏟아져 나왔다. 예정한 30가지가 아니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물어봐야할 것 같은 형식적인 질문 몇 개를 더했다.

 

-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난리가 났는데요. 김 지도께서는 당 통합 문제를 어떻게 보시나요?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당이 가능할까요?

"통합문젠 믿을 수 없을 만치 관심 없습니다. 국민승리21 시절에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 사건 이후에 이건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당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득표가 중심인 당들을 보면서 마음이 식더라고요.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란 누군가가 그들을 대변해주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거잖아요. 전 현재 대한민국에 그런 정당은 없다고 생각해요. 노동자 계급 정당이 가능하다고 생각은 하죠. 근데 외면하고 있거나 무능하거나. 사실 노조운동이 지리멸렬한 이유 중 하나가 당의 부재가 크죠. 정파적 구도에 따른 세력관계는 있어도 계급정당이 없으니까."

 

- 우리가 살면서 버려야 할 것 하나만 꼽아 주세요.

"버려야 할 건 많은데, 활동을 하면서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정파라고 생각해요.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정파라는 건 나름의 정치적 입장이 있고 그 차이에 따라 대립하면서,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앞으로 나갈 수가 있는 건데, 지금 노동운동의 문제는 정파라기보단 종파죠. 패거리. 우리 편이 말하면 다 옳고 상대편이 말하는 건 아예 들이려고 하지도 않는. 이 정권한테 소통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내부 불통의 문제도 심각하잖아요. 종파의 벽에 갇히면 궤변도 논리가 되고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도 판단할 근거가 사라지게 되는 거죠. 쪽수 많은 편이 옳은 게 돼버리니까. 운동을 왜곡하고 오염시킨 많은 문제들이 거기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새로 활동하는 친구들에겐 그런 벽에 갇히자말라고 얘기하는데 쉽지 않죠. 정파가 모태신앙 같은 거니까. 선배가 어느 편이었는지, 첨 노조 만들 때 누가 결합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그때부터 본인도 모르는 벽에 갇히는 거니까."

 

살면서 가져야 할 것, 지켜야 할 것도 함께 물었다. 김 지도는 "진정성, 그리고 또 진정성"이라고 답했다. 처음에는 트위터의 속성상 한 번에 140자를 쓰기 어렵고, 크레인 안팎으로 나름의 일정이 있을 것을 감안해 문답이 오가는 데 며칠을 예정한 것이었다. 뚜껑을 열자 김 지도는 살아온 공력대로 간결하고 힘 있게 즉답을 했으나,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내 다리가 짧아 매번 턱턱 넘어졌다. 괜히 인터뷰를 청했다는 생각이 매일같이 들었다. 자신이 잠갔으나 자신이 열지는 못하는 문을 사이에 두고 김 지도가 저 위에 있다는 사실이 인터뷰 기간 내내 나를 쉬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30개의 답 가운데 인터뷰어인 나를 제일 힘들 게 했던 것은 다음의 이 문장이다.

 

- 가난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해고노동자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실 것 같은가요?

"종일 생각했는데...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김 지도는 다른 답변에는 질문을 확인하자마자 바로바로 답을 했는데, 이 질문에만 한참을 지나 모르겠다는 답변을 해 주었다. 또한 이 답변이 유일하게 한 문장으로 끝난 것이기도 하다. 김 지도의 책 '소금꽃나무'와 여러 글, 인터뷰 답변을 종합해 볼 때 김 지도가 살아 온 인생의 신난고난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2011년 크레인 위가 아니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 인터뷰의 결말이 어떻게 나든 김 지도의 결단을 믿고, 응원하고, 함께 싸우고 싶어졌다.

 

흔쾌히 인터뷰를 승낙하고, 과정이 공개되는 것을 허락해 준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감사한다. 읽는 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울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김 지도의 덕이다. 조금이라도 언짢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목적 없는 질문을 하고 부족하게 엮어낸 내 몫이다. 30문 30답이 끝나기 전에 지상에서 만나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김 지도는 크레인에서 눈을 뜨는 동시에 손과 발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직접 걸어서 크레인을 내려오기 위해 운동 삼아 계단 한 개를 오르락내리락한다고 했다. 부디 부디 건강히, 85호 크레인을 승리의 장소로 만들어내고 내려오시길.

 

글 김희연(자유기고가, 서울 서부비정규센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