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동자를 위하여

'김연아와 박지성의 나라'에서 이럴 줄 몰랐습니다

'김연아와 박지성의 나라'에서 이럴 줄 몰랐습니다
충북 진천 화재로 조선족 아들 잃은 신씨 가족의 외로운 투쟁
10.08.31 21:26 ㅣ최종 업데이트 10.08.31 21:26 이승훈 (bluestag)

  
18일 밤 11시16분께 충북 진천의 한 공장 기숙사에서 화재가 발생,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중국 동포 2명이 숨지고 B씨(58) 등 2명이 팔과 등에 2도 화상을 입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 충북도소방본부 제공
충북진천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고급 물감 말고 일반적인 그림 물감으로 색칠을 할 때 말이야. 엄마, 아빠 얼굴은 무슨 색으로 칠할까? 주황색에 흰색을 섞어서 만든 그 색의 이름은?"

 

이 질문에 '살색'하고 대답을 했다면 당신의 인권 점수는 그리 높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람의 피부색이야 주황색에 흰색을 섞은 것으로 얼추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흑인이나 백인이라면 어떨까? 이제 한민족뿐 아니라 다른 민족과도 어울려 살아야하는 시기이기에 해당 색의 이름은 '살구색'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기술표준원에 이 사실을 권고한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이지만 이것을 제일 처음 진정한 사람은 외국인노동자들의 대부라고 불리우는 김해성(지구촌 사랑나눔 대표, 외국인 노동자 전용의원 이사장) 목사다.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나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는 지구촌 사랑나눔 산하 외국인 노동자 전용의원. 매월 둘째 주 금요일(8월 13일)은 내가 그곳에서 봉사하는 날이다.

 

사실 말로는 '봉사', '봉사'하지만 평일 퇴근 후 추가 진료는 말 그대로 '죽을 맛'이다. 피곤한 몸도 몸이지만, 말도 잘 안 통하는 이들에게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진료하는 것은 정말로 고역이다. 더욱이 요 며칠 심적으로 힘든 일까지 겹쳐서 마음은 이미 집을 향해있었지만 그래도 어쩌랴. 필자가 빠지면 다른 선생님이 내 몫까지 고생할 상황인데.

 

봉사하러 나섰다 접한 중국동포의 안타까운 사연

 

그렇게 힘겨운 진료를 하나 둘 끝내다 보니, 드디어 마지막 환자의 순서. 엥? 어린이 환자? 망했다. 그것도 가장 진료하기 어렵다는 우리 나이로 4살 된 어린이. 아니나 다를까. 진료실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내 진료실 같으면, 저 정도 어린이면 보지도 않고 어린이 치과로 보냈겠지만 어린이 치과의 진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면 이 늦은 밤에 여기까지 찾아 오지도 않았을 터이니 어떻게든 봐야 한다. '그래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자기 암시와 함께 아이를 안고 X-ray(엑스레이)실로 들어가서 불을 껐다.

 

계속 엄마를 찾던 아이에게 "조용히 하지 않으면 내보내 주지 않겠다"라는 말을 해 진정시킨 후 겨우 겨우 진료를 마칠 수 있었다.

 

나도 아이도 땀이 범벅이 되어서 진료가 끝나자 윤수진 외국인 노동자 전용의원장(내과 전문의)님께서 "수고 하셨어요, 오늘 너무 좋은 일 하신 거예요"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신다. 엥? 좋은 일? 어차피 봉사하러 나왔는데 오늘 좋은 일이라니?

 

의아해 하는 나에게 원장님은 아이가 처한 상황을 알려줬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 도저히 넘어갈 수 없다는 마음에 김해성 목사님 그리고 아이의 할아버지를 만나서 정확한 사정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3월 19일, 신씨 가족의 불행은 시작됐다

 

  
지난 3월 18일 밤 11시16분께 충북 진천의 한 공장 기숙사에서 화재가 발생,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중국 동포 2명이 숨지고 B씨(58) 등 2명이 팔과 등에 2도 화상을 입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사진=충북도소방본부 제공)
ⓒ 뉴시스
충북진천

지난 3월 19일 충북 진천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났다. 당시 그 주택에는 15명의 외국인노동자와 1명의 한국인이 거주 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벼운 화상 정도의 피해만 입고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지만 맨 안쪽 방에서 잠을 자던 중국동포(조선족) 신송학(37)씨 등 2명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중국에서 이 청천 병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신송학씨의 아버지(신씨)는 신송학씨의 어머니, 아내, 어린 딸과 함께 신송학씨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3월 21일. 진천의 한 장례식장에서 만난 회사 관계자들은 신씨에게 위로의 뜻과 간단한 경위를 설명하고는 신씨와 그 가족들에게 인근의 모텔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기름과 그을음이 엉겨붙은 얼굴, 두다리의 길이가 다른 처참한 아들의 시신. 꿈이었으면 좋을 악몽같은 상황이었지만 회사 측의 따뜻한 배려에 '역시 한국은 좋은 나라'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보상과 다른 처리를 위해서는 정확한 사망 원인을 알아야 했다. 부검 등의 검사를 하는데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통보. 신씨는 이때만 해도 길어야 한 달이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 가족의 불행은 그때 부터 시작이었다.

 

찾아오는 문상객들(한국의 친척들)을 맞이하고 빈소를 지키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간 3월 23일, 모텔에서 "이틀 간은 회사측에서 비용을 냈지만 오늘 밤 부터는 요금을 내지 않으면 방을 사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당시 시각이 오후 11시. 경황 중에 떠나오느라 환전이고 뭐고 할 시간이 없었던 신씨였기에 사전의 설명도 없었던 상황에 당황했지만 들어온 조의금으로 일단 그날의 방세를 지불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이제는 숙식을 위한 모든 것을 자비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한국의 높은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신씨는 어쩔 수 없이 일가족을 이끌고 영안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기로 결정했다. 3대가 함께 누워자는 상황이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 고생 쯤은 참을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길어야 한 달이면 끝이 날 상황이니까.

 

보상의 길은 멀고... 빵과 라면으로 보내는 하루 하루

 

  
김해성 목사님이 계신 나라라서 한국을 미워하지는 않겠다는 신씨.
ⓒ 이승훈
신씨

하지만 보상의 길은 멀기만 했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해당 공사는 충북 진천군청에서 N토건사에 발주를 준 것이고, N사는 다시 S사에게 재하청을 줬다. 신송학씨 등은 '오야지'라고 불리는 한국인이 잡아준 주택에서 14명의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S사는 "'오야지'는 그저 자신들에게 물품을 납품하는 업자일 뿐 자신들의 직원이 아니며 따라서 오야지가 제공한 주택 역시 자신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오야지'는 오갈 곳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 15명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 '천사'라는 상식 밖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S사는 '오야지'의 통장에 다달이 지급된 월급을 증거로 제시하자, 일단 '오야지'가 회사의 직원임은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회사는 '산업재해'로 처리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신송학씨 등이 묵던 주택은 회사에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해 준 것일 뿐 기숙사가 아니었기에 산업재해로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화재의 원인이 '취사 중 부주의'에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씨는 해당 주택의 가스비, 수도세 등의 모든 관리비를 S사에서 내고 있었기에 기숙사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취사 중 부주의에 의한 화재라는 회사 측의 주장 역시 'TV 근처에서 발화점이 나온 것으로 보아 누전에 의한 화재로 추정된다'는 조사 결과(주방은 발화점과 가장 먼 곳에 있었음)로 뒤집히면서 더 이상 그들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신씨가 더욱 분노한 것은 당시 신송학씨 등이 묵었던 주택이 3월 말이면 철거예정이었기에 저렴하다는 이유로 제공됐다는 데 있다.

 

사측과의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신씨 가족의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장례식장 측은 신씨 가족이 도착한 3월 21일 이후의 모든 비용은 신씨 가족이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4월 말 이후에는 물을 포함한 일체의 식료품 제공을 거부했다.

 

이에 신씨 가족은 2km 정도떨어진 슈퍼마켓에서 빵과 컵라면을 구입해서 외부 정수기 물을 부은 후 매일 매일을 근근히 버텨나가야만 했다. 매일 시신이 드나드는 곳에서 어린 손녀가 고생하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 아팠지만 죽은 아들을 생각해서 정당한 보상 만큼은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해성 목사 도움으로 진천군수를 만난 신씨

 

  
김해성 목사
ⓒ 뉴시스
김해성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신씨에게 불리해져만 갔다. 근로복지공단까지 '산업재해승인'을 거부했기 때문. 이제 신씨에게 남은 선택은 진천군수를 찾아가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가시밭길 뿐인 상황. 그때 그에게 들려온 실낱같은 희망은 '중국동포의 집'의 김해성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는 이야기였다.

 

5월 말경, 그야말로 예수를 찾아가는 한센병(나병)자의 마음으로 무작정 올라온 서울. 그는 강변터미널이 동서울터미널인지도 몰랐고 '구로디지털단지'라는 생소한 단어를 외우지도 못했지만 물어 물어 중국동포의 집을 찾았다.

 

그렇게 만난 김해성 목사는 그간의 사정을 묵묵히 들은 뒤 신씨의 손을 꼭 잡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겝니다"라고 위로한 뒤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손에 쥐어주고는 "아이에게 라면만 먹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 돈으로 맛있는 것 좀 사서 먹이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신씨는 아들의 시신 앞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단다.

 

보상에 관한 문제는 자신들이 맡아서 할 터이니 일단은 지친 몸과 마음을 쉬라면서 중국동포의 집 내에 숙소를 정해주던 날.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갖춰진 식탁에 신이 난 손녀가 "이야, 쌀밥이 너무 맛있다"고 좋아하던 순간 신씨는 차마 식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중국동포의 집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불가능이라고 믿었던 진천군수와의 대면에서 신씨는 자신의 상황을 해결하기보다는 '중국인이라서 겪어야 했던 부당한 처우를 개선해 주길' 청했고 이에 진천군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나는 세가지 질문을 했다. 이번 일로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 가장 고마운 사람 그리고 가장 걱정되는 점. 신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아들 놈이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김연아도 박지성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국은 멋진 나라다. 이 중국에서 구덩이만 바라보지 말고 한국에 가서 더 큰 그릇이 되거라, 하며 한국행을 말리지 않은 이 늙은이가 세상에서 제일 원망스럽습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그야 당연히 김해성 목사님이시죠. 저한테는 그분이 아버지요, 하나님입니다. 저는 중국에 있을 때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해성 목사님께서 믿는 종교이기에 저도 지금은 기독교인입니다. 이 많은 식구 먹고 재우고 건사해 주시는 게 보통 일 아님은 제가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드리려고 교회 일이라면 팔 걷어 붙이고 어떤 것이라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실제로 신씨는 교회내 잡일과 잔심부름 그리고 자잘한 수리 등 소사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제일 걱정되는 거요? 저야 이렇게 살다 늙어죽으면 그만이죠. 그리고 며느리야 재가하면 되잖습니까? 하지만 저 어린 것. 저 놈 살길은 어떻게든 만들어 놔야죠. 나 죽은 다음에 저 어린 것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에 잠이 안 옵니다. 힘이야 들지만 저 어린 것을 위해 약해지지 않아야죠."

 

인터뷰 후 나는 시간을 내주신데 대한 고마움과 한국인으로써의 미안함을 담아 봉투를 하나 건네드렸지만 신씨는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관심 갖아 주신 것이 돈보다 훨씬 더 큰 힘이 된다"며 손녀를 치료해 준 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는 수줍게 웃고는 방을 나가는 신씨.

 

신송학씨가 조선족 아니라 미국인 강사였다면?

 

  
고 신송학(37)씨. 자신이 떠난 이후 가족이 받았던 고통을 안다면 얼마나 슬퍼하고 계실까.
ⓒ 이승훈
신송학

아까 내가 한 '봉사'가 생각나서 갑자기 너무나 서글퍼졌다. 환자를 위해 매섭게 다그쳐서 진정시켰다고 스스로는 위안을 떨었지만 사실 '마지막 환자라서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었던' 마음은 없었는지 반성이 드는 순간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했다.

 

흔히 자녀를 잃은 슬픔을 단장(斷腸)의 아픔이라 한다. 창자가 끊어진 듯 견딜 수 없는 아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죄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지금 신씨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들에게 권했던 '김연아와 박지성의 나라'의 비정함과 치가 떨리는 중국인에 대한차별, 그리고 그런 지옥 같은 나라를 아들에게 권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다.

 

만약 신송학씨가 조선족이 아니라 미국인 원어민 강사였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한 외국어학원에서 미국인 원어민 강사에게 철거 직전의 숙소를 제공했고 그곳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그 사람이 사망하였다면, 과연 국가도 언론도 사회도 모두 지금처럼 외면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안의 인종차별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작은 희망이 신씨를 비추고 있을 뿐, 아직도 상황은 신씨에게 절망적이다. 회사 측에서만 인정하면 '산업재해' 승인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산업 재해'가 누적될 경우 해당 회사는 다음 발주에서 페널티를 물기 때문에 사측은 어떻게든 산업재해 승인 만큼은 피하려 애쓰는 중이다. 한 사람의 죽음과 가장을 잃은 유가족의 아픔. 하지만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중국인이라서 겪어야할 모진 차별과 사람의 죽음조차도 돈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현실의 비정함이었다.

 

현재 N사와 S사 모두 '약간의 도의적인 양심의 표시' 이상의 보상은 거부하고 있고 '산업재해 신청'도 거부하고 있다. 그 사이 장례식장에 지불해야할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라 신씨 일가는 파산 위기에 몰린 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