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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6월2일 치러질 지방선거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6월2일 치러질 지방선거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12월 검찰이 한 전 총리를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5만달러를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로 기소했을 때만 해도,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을 향한 레이스를 시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3월8일 5만달러 수수 여부를 다투는 재판이 시작된 이후 분위기가 급반전되고 있다. 특히 3월11일 2차 공판에서 곽 전 사장이 검찰의 기소 내용과 다른 진술을 하면서 그동안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 “세상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한 달 동안 검찰과 진실을 가리는 싸움에 돌입했다. 그는 검찰이 뇌물 수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6·2 지방선거에서 태풍의 눈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전달 순간 ‘디테일’ 번복… 검찰에 치명타

이번 사건처럼 공여자(돈을 건넨 사람)의 진술 외에 뚜렷한 증거가 없는 뇌물 사건의 경우에는 공여자의 진술 태도나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재판에서 매우 중요하다. 대법원 판례는 ‘공여자의 진술에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이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즉, 돈을 건넸다는 사람이 당시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일관되게 진술해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재판부가 뇌물 수수 혐의를 인정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곽 전 사장은 3월11일 공판에서 한 전 총리를 만났을 때 2만달러와 3만달러가 든 봉투 2개를 “앉았던 의자에 놓고 나왔다”고 진술했다. 검찰 조사 단계에서 작성된 조서를 보면 “돈봉투는 한명숙의 손에 준 건가, 다른 가구 위에 두고 왔나?”라는 검찰의 질문에 “어디다 올려놓고 그럴 만한 곳이 없었던 것 같다. 한명숙에게 바로 건네준 것 같다”고 답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일반인의 눈에는 곽 전 사장이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는 진술에 변화가 없는 만큼 직접 건넸는지 아니면 의자 위에 두고 나왔는지가 별 차이가 없는 진술로 보일 수 있지만, ‘오로지 한 사람의 말에 의존해 진실을 파악해야 하는’ 재판부의 입장에서는 이런 진술 번복이 큰 판단 기준이 된다. 뇌물 사건 전담 재판부에 근무했던 한 부장판사는 “아무래도 뇌물을 줬다는 사람은 받았다는 공직자에 비해 인간적인 신뢰감이 덜한데다, 진술 하나 때문에 고위 공직자의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점을 신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서 “일관된 진술도 꼼꼼하게 따져 의심하는데, 진술이 바뀌어버리면 어떤 말도 쉽게 믿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검찰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사 과정에서 한 이야기를 자세히 조서에 남기는 게 보통이다. 돈을 건넬 당시 상대의 옷색깔이나 쇼핑백 크기부터 어느 자리에 앉아 있었고 돈은 주머니에 넣었는지 핸드백에 넣었는지 등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곽 전 사장의 이번 법정 진술은 가장 중요한 순간을 설명하는 ‘디테일’을 전부 뒤집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전달 장소가 가정집도 아니고 직원이 많은 총리 공관이었기 때문에 검찰은 의자 위에 놓인 돈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지 않았다는 점까지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그렇지 않으면 “뇌물 수수 사건이 아니라 돈봉투 분실 사건”이라는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의 비판이나 “한명숙이 아니라 의자를 기소하라”는 누리꾼들의 조롱을 피하기 힘들다.

4월9일 선고, 지방선거 판도 변화 분수령

2차 공판에서 곽 전 사장의 진술로 드러난 또 하나의 민감한 부분은 표적수사·강압수사 논란이다. 그는 “변호인과 상의한 뒤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는 취지로 조서를 재작성했더니 검찰에서 정치인 얘기를 계속하라고 했다. 하도 몸도 아프고 죽게 생겨서 다시 ‘줬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곽 전 사장이 거짓 진술을 했다고 고백한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진술했다는 점은 시인한 것이다. 검찰도 곽 전 사장의 이런 진술을 예상치 못한 듯 당혹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특수부 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곽 전 사장처럼 비참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사람이 내놓은 진술은 수사 검사들조차 되도록 믿지 않고 확인을 거듭한다”고 전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부정확한 진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검사들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6월2일 심판의 날, 맨 앞에 서겠다”며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밝힌 한 전 총리의 정치적 비중을 감안하면, 현재까지는 검찰이 보여준 칼날은 지나치게 무딘 셈이다. 게다가 검찰이 정치의 중심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버렸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1심 판결은 4월9일로 예정돼 있다. 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형두)은 6·2 지방선거 일정을 고려해 3월8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일주일에 세 차례씩 집중 심리를 진행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빠른 진행이다.

여야 모두 이번 지방선거는 바로 그 4월9일 이후 제대로 된 구도가 잡힐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 전 총리 재판 결과가 그만큼 주목을 받고 있다. 지방선거의 전체 판도가 바뀌는 분수령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크게 보면 무죄가 선고될 경우 민주당을 포함해 선거 연합을 추진 중인 야권에 유리하고 유죄의 경우 그 반대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황 변화에 따른 위기 타개책을 찾기 위해 정치권은 늘 움직인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만 해도 그렇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민주당 후보로 나서면서 앞서갔지만, 정계 은퇴를 선언한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 뛰어들면서 판이 뒤집혔고, 결국 두 후보의 격차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범야권 상징성 가지고 있어 파괴력 만만찮을 듯

»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은 진실을 아는 또 한 명의 당사자다. 세간의 이목이 그의 입에 집중되고 있다.

4월9일 1심 선고에서 뇌물 수수 혐의를 벗을 경우 한 전 총리는 튼실한 날개를 달게 된다. 현재도 민주당에서, 그리고 야권을 통틀어 가장 유력한 후보지만 더욱 입지를 단단히 굳히게 된다. 한 전 총리는 민주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지만 민주당 사람만은 아니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이명박 정권·검찰·수구언론의 정치공작 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는 민주당 인사 외에도 이해찬 전 총리, 권영길 전 대표(민주노동당), 이병완 전 비서실장(국민참여당), 이창복 시민행동 대표 등이 참여하고 있다. 6·2 지방선거를 위한 야권 연대 틀인 ‘5+4’(5개 야당과 4개 시민사회단체) 회의체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세상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한 전 총리의 항변이 재판 결과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면, 지지율에 탄력이 붙으면서 여권 후보를 위협하는 대항마로 부상할 전망이다. 그럴 경우 야권에서 잠재적 경쟁자로 평가되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단일화 논의에서 다른 정치 세력보다 높은 장벽으로 여겨지는 진보신당과의 관계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보다 여권에 더 위협적인 요소는 선거 구도의 변화다. 이번 6·2 지방선거는 2006년 지방선거에 비해 현재까지는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다. 청와대발 세종시·4대강 논란에 묻혀 있고, 그나마 쟁점으로 부각된 의제가 친환경 무상급식 정도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도는 시점이고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로 가는 징검다리 성격임에도, 지방선거 구도에서 ‘이명박 정부 중간 평가와 독선적 국정 운영 견제’라는, 야권의 정권심판론 프레임은 도드라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한 전 총리의 재판 과정에서 검찰 기소가 무리한 것이었다고 판명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야당 탄압과 표적 수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얹어지는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데자뷔’까지 겹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23일 검찰 수사를 받던 중에 서거했다. 이후 검찰 개혁 목소리가 높았고 결국 검찰 수뇌부가 교체됐다. 한 전 총리에 대한 검찰의 기소가 부당한 정치 탄압으로 여겨진다면, 지방선거 일정 한복판에 있는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지지층의 결속이 강해지고 서울발 열풍이 경기도와 인천 등 수도권으로 전파될 것으로 민주당은 보고 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컨설턴트는 “이명박 정부가 무리하게 기소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한명숙 전 총리뿐만 아니라 진보개혁 진영이 굉장한 탄력을 받을 것”이라며 “한 전 총리가 중심에 서고 경기도에 유시민, 인천에 송영길 의원이 출마해 불꽃 튀는 싸움이 일면 수도권 전체가 ‘붐업’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몽준 대표 등 제3후보 차출해 대항 나설 수도

3월11일 2차 공판 이후 한나라당의 수면 아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서울시장 후보로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 외에도 원희룡·나경원·김충환 의원 등 쟁쟁한 ‘장수’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만약의 상황을 위한 ‘제3후보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재판에서 살아 돌아온 한명숙은 예전의 한명숙이 아닐 것이므로, 현재 거론되는 후보로는 열세를 면하기 힘들다는 우려 때문이다. 친이명박계의 핵심으로 꼽히는 정두언 의원은 “상황을 봐서 오세훈 시장이 뻔히 지게 생겼으면 정몽준 대표라도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제3후보론도 여러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론되고 있는 제3후보의 면면이 이채롭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정운찬 국무총리, 박세일 전 의원(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등이다. 이들이 여권 내부에서 지니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여권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 한나라당 사정에 밝은 한 보수 인사도 “무죄판결이 나면 현역인 오세훈 시장이나 원희룡 의원 정도로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며 “그래서 제3후보론과 정몽준 대표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학자 출신은 온실 속의 화초여서 선거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정운찬 총리와 박세일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을 낮게 봤다.

반면, 한나라당 안팎에서 제3후보론의 정치적 함의에 그다지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쪽도 있다. 선두권을 유지하는 인사들이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경선 제도를 볼 때 현실적으로 힘들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수준을 높여 영입을 해야 하는데 그런 카드가 있을지 모르겠고, 영입을 한다 해도 당내 논란이 불거질 텐데 현실적인 제약 요인이 많다”고 말했다.

검찰이 명확한 증거와 증언으로 한 전 총리의 유죄를 입증한다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선거운동 기간에 한 전 총리의 도덕성에 공격이 집중될 것이므로 야권이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선거는 여권의 프레임으로 진행될 것이며, ‘5+4 협의체’가 극적으로 선거 연합에 성공하더라도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애매한 유죄판결 땐 모두가 불행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긴 하다. 검찰의 유죄 입증이 불완전하다고 비판을 받는데도 한 전 총리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다. 여야가 아전인수식으로 재판 결과를 해석하며 난타전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결과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정치적으로 이득을 보는 쪽이 있을지는 몰라도, 정치권·정부·사법부,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이 가장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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