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이 ‘세한도 비밀’ 매듭 풀었다 | |
박철상씨, 20여년 추사 편찬서 등 자료 통해 고증 “소동파 ‘언송도’ 창작 뿌리…스승 옹방강 시 영감” | |
노형석 기자 | |
‘시린 한 겨울 그린 그림’. 이런 뜻을 지닌 대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걸작 <세한도(歲寒圖)>는 얼핏 보면 참 썰렁한 작품이다. 휑한 화폭에 소나무, 잣나무 네 그루에 둘러싸인 초가집 한 채만을 물기 없는 먹으로 까끌하게 그려 넣었을 따름이다. 마냥 쓸쓸한 느낌 감도는 그림을 왜 최고 명작이라고 할까. 그건 이 그림이 사실적 형상이 아니라 작가의 인품과 학식, 인생 역경이 처절하게 녹아있는 문인화이기 때문일 터다. 명품 <세한도>를 추사가 어떤 구상과 창작 배경을 갖고 그렸는지는 지금껏 수수께끼였다. 무엇보다 어떤 시점에, 어떤 경위로 그렸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었다. 1844년 제주에서 유배중이던 추사가 청나라 서적 등을 잊지않고 보내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1804~65)의 푸른 소나무 같은 정성에 보답하려고 그려줬다거나 후대 일본 학자 후지츠카가 일본에 가져갔다가 서예가 손재형이 2차 대전 공습을 피해 기적적으로 다시 갖고 들어왔다는 일화만 알려졌을 따름이다. 사거 150년 지나도록 추사 그림과 관련한 기초적인 문헌 연구는 별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미술사학자가 아닌 현직 은행 간부가 이 미스터리의 매듭을 풀었다. 은행일을 하면서 20년 이상 추사 문헌 연구에 몰두해온 박철상씨. 그는 이달초 출간한 저술 <세한도>(문학동네)에서 지난 1~2년 사이 희귀 고문헌 사료를 수집·분석한 결과 <세한도> 그림의 원형은 12세기 송나라의 대문인 소동파의 겨울 소나무 그림 <언송도>(현재는 전하지 않는다)에 뿌리를 두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20대 청년 시절 청나라행 사신단에 끼어 당시 연경(북경)에 갔던 추사가 현지 대학자인 옹방강(이때 만나 추사의 큰 스승이 된다)의 거대한 서재에 들렀다가 본 <언송도> 관련 시에서 창작의 단초를 얻었다는 사실을 고증해낸 것이다. 고증의 단서는 1년여전 박씨가 우연히 읽은 <복초재적구>라는 추사의 편찬서였다. 스승 옹방강의 한시와 시론들을 추려 해설한 이 문헌 서문에는 추사가 옹방강 서재의 장대한 정경을 본 체험기가 들어있다. 바로 여기서 <언송도>에 대해 옹방강이 지은 시구를 보고 추사가 감동하는 대목이 나온다. ‘고목이 된 소나무는 비스듬히 나무가지 드리우고 집에 기대어 있네 ’라는 ‘고송언개전기호’라는 시구. 큰 소나무 하나가 우뚝한 젊은 소나무에 기대어 집을 싸안은 <세한도>의 구도와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아닌가. 게다가 추사는 소동파의 평생 풍모를 좇았던 마니아였으니. <세한도>의 미스터리를 밝히는 실마리는 여기서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북경을 다녀온 추사는 그 뒤 이 옹방강의 이 시구를 평생 머리 속에 새기고 그림으로 표출할 때를 기다렸을 것이라는 게 박씨의 분석이다. 추사는 이후 당시 청의 그림 서적을 입수해 학문적 연구에 몰입하는데, 박씨는 실제로 추사가 청나라 산수화가 장경(1685~1760)이 지은 <국조화징록>이란 청대 화가들의 전기를 평생토록 매우 아끼며 보았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
<국조화징록>은 추사가 직접 제목을 써서 붙였을 뿐 아니라, 중요 화가들을 언급한 대목에는 일일이 붉은 동그라미나 각주를 치는 등 각별히 읽고 공부한 손때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추사는 장경의 그림풍을 자신이 추구해야할 학문적 그림 세계의 ‘로망’으로 보고, 그의 전기 내용을 자기 문집에 수시로 인용했다. 아울러 장경의 화첩 <장포산첩>(간송미술관 소장)도 아껴가며 탐독했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이 화첩을 항상 곁에 두며 감상했고, 노년에 병에 걸리자 ‘절대 이 화첩을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사실상의 유언까지 남길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제자인 화가 허소치로부터 먹을 붓에 짙게 묻혀 찍는 초묵법을 익혀 훗날 <세한도>에 썼다는 사실이다. 박씨는 “최근 발굴한 그의 친구 초의선사에 보낸 편지에서 소치에게 초묵법을 익혔다고 추사가 고백한 대목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역관 이상적은 <세한도>를 건네받은 뒤 사신으로 중국에 사행하는 길에 그림을 들고 건너가 장요손 등 현지 유명 문인 16명의 평글을 받은 뒤 그림 옆에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애초엔 13명만 직접 받았고, 나머지 4명은 나중에 편지 형식으로 평글을 보냈다가 3명의 글만 다시 덧붙여진 사실도 박씨의 추적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결국 <세한도>는 추사가 20대 중국에 갔을 때 본 스승 옹방강 서재 풍경, 그곳 학자들간의 교류상 등을 파노라마처럼 평생 하나하나 떠올려가는 과정에서 창작 모티브가 형성된 것”이라며 “<세한도>의 탄생과 전래 과정은 19세기 한중 학예 교류사의 빛나는 결정에 다름 아니다”고 평했다. 박씨가 찾아낸 추사의 <세한도> 관련 사료들과 희귀서적, 그리고 19세기 한중 지식인들 사이에 오고간 주옥같은 문헌, 편지들은 서울 관훈동 화봉갤러리의 기획전 ‘추사를 보는 열개의 눈’(3월1일까지, 02-737-0057)에 전시중이다. ‘실사구시잠’ ‘귀로재’ 같은 낯선 추사 글씨 명품들과 더불어 감상할 수 있다. 글 노형석기자 nuge@hani.co.kr, 도판제공 화봉갤러리, 박철상씨
'예술이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관이 된 수영장, 아틀리에가 된 공장 (0) | 2010.01.23 |
---|---|
‘화려한 휴가’ 덤벼보니 자꾸 욕심이… (0) | 2010.01.14 |
한예종 소식 (0) | 2010.01.13 |
"박헌영이 미제 간첩?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애국자" (0) | 2010.01.06 |
'저 달이 차기 전에' (0) | 2009.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