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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네

병마와 싸우며 11년째 칩거… 1인 창무극 명인 공옥진 전격 인터뷰

병마와 싸우며 11년째 칩거… 1인 창무극 명인 공옥진 전격 인터뷰

국민일보 | 입력 2009.12.01 17:38

 




"병신춤이라 부르지들 말어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몸짓이여"

뛰고 구르며 걸죽한 입담과 익살스런 표정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던 그 몸짓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오랜 병마와 싸워온 힘겨운 시간들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을까. 무명 저고리와 버선 한 켤레, 그리고 쥘부채 하나로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던 1인 창무극의 명인 공옥진(78). 한 달 전 KBS 스페셜을 통해 어려운 생활 등 근황이 소개된 뒤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올라 화제가 된 그를 지난 26일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예술연구소에서 만났다. 두 번의 뇌졸중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998년 무대를 떠난 이후 11년째 칩거 중인 공씨가 언론과 전격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다.

"어여 와. 언제 왔냐?"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연습실 한쪽 13㎡(4평)짜리 방에는 이불과 옷가지 등이 이리저리 널려 있고 구석에는 요강이 놓여 있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깊은 탓에 병원과 자택 골방을 오가며 지내는 그는 이빨이 5개밖에 남아 있지 않아 발음도 불분명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손님이 온다는 소식에 미리 화장도 하고 눈썹도 그렸다며 "예쁘냐"고 물었다. "25년간 무대에서 그렸다가 지우고 또 그렸다가 지우고 했더니 눈썹이 다 없어졌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인터뷰는 영광문화원에서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는 수제자 한현선씨와 20년 가까이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을 이어온 박동국 동국예술기획 대표의 '통역 아닌 통역'으로 진행됐다.

먼저 "빨리 완쾌하셔서 다시 무대에 오르셔야죠"라고 인사를 건넸다. 무대라는 말에 그는 눈을 껌뻑거리며 본능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게 내 소원이여. 내 소원." 98년 두 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2006년 집 앞에서 교통사고까지 당한 그는 '3차 신경통'이라는 새로운 병을 얻어 걷기도 힘든데다 오른쪽 손마저 떨고 있다. 밥을 물에 말아먹거나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상태.

사고 전까지만 해도 공옥진은 '대박공연'의 보증수표였다. 91년 서울 호암아트홀(900석)의 3차례 공연과 94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3600석) 무대의 전석 매진은 전통공연으로는 보기 드문 기록이었다. 자신의 인생속 굽이굽이 녹아든 한을 그만의 솜씨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관객들이 함께 웃고 울었다.

한때 돈도 좀 벌었지만 한푼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쓰는 바람에 자신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2007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원의 생활비를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그는 인간문화재가 되면 월 수당 80만원과 전수비용 등을 지원받을 수 있지만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그것도 여의치 않다.

인간문화재 얘기가 나오자 그는 "열병할 문화재, 더 이상 말하지 말어"라며 손을 내저었다. 문화재 지정 자격을 놓고 10년간 논란을 빚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한참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문화재 '문'자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져. 사람들은 내가 무형문화재인 줄 알아. 이미 내가 온 국민이 아는 문화재인데 누가 또 무슨 문화재를 준다는 거여."

공옥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곱사춤이다. 뒤틀었다 풀듯 돌아가는 몸짓이 일품이다. 분장도 없고 조명도 없이 천의 얼굴로 무대장치를 커버하는 그의 몸짓을 사람들은 '병신춤'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눈을 부릅뜨고선 "내 가족이 장애인인데 어떻게 내가 병신춤을 춘다는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연은 깊었다. 그는 슬하에 딸 하나, 외손녀 두 명, 그리고 외손자 한 명을 두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남동생은 벙어리였고 손수 키운 조카는 곱추였다고 한다. 남동생은 극장에서 부랑배들과 승강이를 벌이다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기구한 가족사이다.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할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고 벙어리나 곱추 연기도 마찬가지여. 다시는 병신춤이라고 하지들 말어."

그는 남도 인간문화재 1호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서울 협률사 초기 멤버였던 공창식 명창. 일곱 살 때 1000원에 일본에 팔려간 적도 있었다. 당대 제일의 무용가인 최승희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일본인집에 넘겨진 뒤 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장터에서 춤을 추고 창을 한 것이 창무극의 시작이었다.

'서리서리 한맺힌 구성진 가락은 한여름철 장대비와도 같고 헤살 궂은 사설조마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 담겨 있다'는 평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하얀 옥양목 치마끝에 찍어낸 눈물은 바다를 이룰 정도이고, 지난 세월은 어느 대목을 들어도 고초와 한숨이며, 통곡의 파노라마다.

얼마 전 집 앞마당에서 쥐 한마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쥐처럼 쭉 내민 채 춤을 추는 시늉을 했다는 그에게는 한 가지 약속이 있다. "나를 위해 죽도록 고생한 우리 동국이 아들, 큰돈 벌게 해줘야 하는디"라고 입버릇처럼 했던 약속을 내년 4∼5월, 봄이 오면 병을 훌훌 털어버리고 꼭 무대에 올라 '대박공연'으로 지키겠다는 것이다.

공연 제목은 '옥진이, 동면에서 깨어나 학이 되어 날아가리라'로 오래 전에 정해졌다. 이 무대에는 친정 증손녀인 인기그룹 2NE1의 막내 공민지(15)도 함께 오를 예정이다. 무대에 서면 진흙탕에 뒹굴듯 몸을 사리지 않는 공옥진. 인터뷰를 끝내고 집을 나서자 "조심혀서들 가"라고 배웅하는 그의 어깨에는 파란만장한 삶의 무대에 드리워진 '이 시대 마지막 광대'라는 견장이 빛나고 있었다.

겨울이 가면 봄은 또 올 것이다. 봄이 오면 그는 또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는 희로애락의 몸짓으로 사람들을 또 한바탕 울리고 웃길 것이다.

영광=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