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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청소년 문학

어린이 ‘정신세계’를 둘러싼 전쟁

어린이 ‘정신세계’를 둘러싼 전쟁
[우석훈의 세상읽기]
2009년 09월 21일 (월) 09:37:39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webmaster@pdjournal.com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가장 최근에 내가 끝낸 책은 대학생들을 독자로 설정하고 있으며, 가장 최근에 계약한 책 역시 학부 1~2학년을 위한 방법론 기초에 관해 서술했다. 대학생들은 책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대학생용 책은 상업성이 없다고 별로 권유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처럼 대학생들이 취업용 공부나 고시용 공부 외에는 관심 없어 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학생들을 위한 책들을 좀 쓰려고 한다.

가끔은 10대들을 위한 책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10대라고 할 때에는, 좀 특별한 10대를 독자로 상상한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아니면 까뮈의 〈페스트〉 같은 책들은 대체적으로 10대 때 읽는 소설책이기는 한데, 이상하게 나이를 먹으면 이런 책들은 잘 안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겹고 재미없는 책들을 읽는 시기가 10대가 아니던가! 물론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정도는 읽었을 것이라고 설정된 10대들을 위한 내 책은 그렇게 상업적인 책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내가 가장 어려워하고, 아직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것이 어린이를 위한 책이다. 13살 미만, 그들이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몇 년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나는 도저히 그 입구를 찾지 못했다. 출판사에서 가끔 어린이용 책이나 원고에 대해서 부탁을 하기는 하는데, 나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중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권정생 선생이나 이오덕 선생 같은 분들의 책을 읽어보면, 새삼 이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최근의 아동문학에도 몇 가지 흐름들이 있고, 어른들이 본다면 엽기적일 정도로 무서운 얘기들과 현실적인 얘기들을 어린이들이 잘 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무조건 곱고 아름답고 예쁜 ‘요정 얘기’만 해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최근의 아동 문학의 유행을 몇 가지 살펴보시길 바란다. 한국에서 아동 문학이 본격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은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어린이던 시절, 그러니까 10년 전, IMF 지나고 막 한국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한 직후의 일이다.

   
▲ 어린이 월간잡지 <고래가 그랬어>
이걸 출판계에서 보통은 386들의 2세가 어린이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동화책이나 맘껏 사주고 싶었던 부모들의 바람이 시장 내에서 현실화된 것으로 해석한다. 진실인지, 아닌지, 그건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격동의 386들의 2세 흐름이 지나가고, 다음 흐름이 생기면서 여기에도 위기가 오는 중이다. 아동 문학 내에서의 위기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경쟁이 생긴 것이다.

이 흐름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경제단체와 경제신문들이 주도하는 어린이 경제교실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이들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기 위한 지독할 정도의 경제근본주의를 신봉하는 경제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아동들의 시간을 놓고 대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2009년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만화 천자문’으로 상징되는 아동용 학습만화 등 돈 잘 버는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들이 어린이 경제교실과 한 축을 형성하고, 동화와 만화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시각 등 경제가 아닌 기본 소양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동화책과 어린이 생태캠프 같은 것들이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어린이를 돈만 아는 존재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돈이 아닌 것도 세상에는 존재한다고 하는, 일종의 감성과 양심을 가진 존재로 자라나게 할 것인가, 이게 거대한 전선이 된 셈이다. 이 반대의 전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고, 또 실제 어린이들도 재미있다고 하는 매체가 바로 〈고래가 그랬어〉라는 만화를 주축으로 하는 어린이 종합교양지이다.

어린이들에게 돈을 가르치고, 재테크를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만화를 집어들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볼 것인가, 이게 우리가 맞을 다음 시대를 위해서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지난 정부에서 KBS와 MBC 모두 어린이들에게 돈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돈이냐, 꿈이냐, 어린이의 정신세계를 둘러싼 이 전쟁은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누가 이데올로기는 종말 했다고 감히 말하는가! 경제근본주의와 이걸 막으려는 싸움, 그 어린이들의 삶과 정신을 둘러싼 싸움이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경제단체와 경제신문이 주도하는 어린이 경제교실 앞에 혼자서 버티고 있는 〈고래가 그랬어〉, 그 고단한 싸움에 경의와 지지를 보내고 싶다. 참고로, 지금 OECD 국가에서 어린이들에게 돈을 정색을 하고 가르치는 나라는, 이 고단한 나라, 대한민국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