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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명왕보살의 형상을 조각한 대불모공작명왕경암. 1066존의 불상을 배경으로 조각된 중국 남방불교예술의 극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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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법신들을 배경으로 서있는 일월보살상. 아쉽게도 채색은 거의 다 떨어진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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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 천지 다주현, 75곳에 10만여 존 석각 있어
다주는 석각의 천지(天地)다. 다주현 내에만 75곳에 10만여 존의 석각이 있다. 이 중 바오딩(寶頂)산, 베이(北)산, 난(南)산, 스하오(石籇)산, 스먼(石門)산 등은 다주 5대 석각이다. 중국정부가 지정한 국보로 다주석각의 정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석각은 바오딩산과 베이산 석각이다.
바오딩산석각이 다주현청에서 15㎞나 떨어져 있는 것과 달리 베이산은 서북쪽으로 불과 2㎞ 떨어져 있다. 베이산의 본래 명칭은 룽강산(龍崗山)이다. 다주현청의 북쪽에 있어서 지금과 같은 이름을 얻었다. 베이산석각은 산 중턱에 복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석굴이 줄지어 이어져 마치 벌집과 같다.
베이산석각에 미치지 못하지만, 난산석각도 놓치지 말아야 할 유적이다. 다주현청에서 남쪽으로 3㎞ 밖에 위치해 있지만, 교통이 불편해 찾는 이가 없다. 다주석각에서 유일하게 도교 관련 석각만 완벽하게 보존된 곳이다. 남송시대부터 조각된 500여존의 석각이 있는데, 이중 삼청고동(三淸古洞)은 현존하는 송대 석각 가운데 가장 정교하다.
다주현청에서 동남쪽으로 20㎞ 떨어진 스먼산에는 송대 조성된 석각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스먼산석각은 유·불·도 3교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십성관음동(十聖觀音洞), 천리안(千里眼), 순풍이(順風耳) 등의 석각이 대표적으로, 중국 내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스하오산석각은 다주현 서남쪽 산취(三驅)진 포후이(佛惠)촌에 있는 해발 444m의 산자락에 있다. 스하오산석각은 1082년에서 109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조각됐다. 총 길이는 130m, 높이는 석각에 따라 3~8m로 각기 다르다.
스하오산석각 중 공자십철감(孔子十哲龕)은 정면은 공자 상이, 양측에는 공자의 저명한 10대 제자가 조각된 희귀한 불교 석상이다. 노군감(老君龕)은 중앙에는 노자 상이, 좌우에는 7인의 진인(眞人)과 법사(法師) 상이 있다. 유·불·도가 공존을 넘어서 융합의 양상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저명한 조각가인 문유간(文惟簡) 등이 석상 제작에 참여하여 예술적 가치가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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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산의 천수관음상은 바오딩산의 것과는 다른 입체감을 보여준다. 손은 세월의 풍상을 겪어 대부분 잘라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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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화한 미소가 아름다운 보현보살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베이산의 자랑거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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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베이산석각, 시대별 불교 변화상 보여줘
바오딩과 더불어 다주의 양대 석각인 베이산은 총 길이 1㎞에 달한다. 베이산석각은 892년 당나라 말기에 시작하여 오대를 지나 남송까지 약 250여년에 걸쳐 조성됐다. 다주석각 중 만들어진 시기가 가장 빠르다. 현존하는 석각은 4600여존인데,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 많다.
베이산석각 입구 부분에 있는 천수관음상은 바오딩산의 것과는 다른 입체감을 보여준다. 당대 말기 작품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석각 중 하나다. 눈에 잘 띄지 않은 보현보살상은 온화한 미소와 고아한 자태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양 여성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다주 사람들은 '동양의 비너스'라고 부른다.
석각군 중간에 위치한 전륜경장굴(轉輪經藏窟)은 베이산 최고의 조각품 중 하나다. 석굴은 높이 4m, 너비 4.7m, 깊이 7m에 달한다. 보존 상태가 완벽하고 모든 석각이 개성이 넘친다. 석굴 좌우 양쪽 벽에 조각된 4대 보살상은 완연히 중국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대표적인 조각품으로 꼽혀, 보호를 위해 석굴 내는 여행객의 진입이 금지되어 있다.
전륜경장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걸작품 대불모공작명왕경암(大佛母孔雀明王經巖)이 있다. 높이 3.5m, 너비 3.2m, 깊이 6.2인 장방형의 석굴이다. 중앙에는 가부좌한 명왕보살이 공작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전체 벽면은 불상에 새겨져 있는데, 정확히 높이 18㎝, 폭 6㎝의 1066존이 조각됐다. '석조궁궐'(石雕宮闕)이라 불릴 정도로 송대 조각품의 대표작이다.
베이산석각 끝부분에는 관무량수불경변상(觀無量壽佛經變相)이 있다. 관무량수불경변상(觀無量壽佛經變相)이 있다. 관무량수불경변상은 높이 4.7m, 너비 2.58m에 불교 경전 <관경>(觀經)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각했다. 위는 극락정토를, 중간은 인도에서 온 석가모니와 두 보살을, 아래는 극락정토에 들어서기 위해 생전 쌓아야 할 덕행을 나열해 놓았다. 주변 벽면에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수행 방식을 조각했다.
베이산석각의 특징은 무엇보다 시대별 불교 미술의 변화상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당대부터 송대까지 걸쳐있는 베이산의 석각은 각기 다른 풍모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베이산석각은 미술사를 대조해서 이해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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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륜경장굴의 내 일월보살상. 전륜경장굴의 4대 보살상은 베이산석각에서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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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보현보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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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주석각, 1999년 세계유산 등재, 한 해 관광객 100만 명 넘어
지난 1999년 12월 다주석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세계유산'은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계승해야 할 문화 및 자연유산을 가리킨다. 1972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전체총회에서 결의된 '세계 문화와 자연유산 보호를 위한 협약'으로 시작됐다.
2008년 말까지 전 세계 145개 국가에서 878건의 세계유산이 지정되어 있다. 문화유산은 679건, 자연유산은 174건 그 밖에 문화와 자연 유산이 겹치는 25건이 있다. 중국은 모두 38건의 세계유산을 등록시켜 이탈리아(43건), 스페인(40건)에 이어 3번째로 많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 다주석각은 중앙정부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주는 758년 당나라 건원(乾元) 원년에 현소재지로 독립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곡식이 아주 풍족하다'(大豊大足)고 하여 다주로 불렸다.
다주는 쓰촨성 수도인 청두(成都)와 직할시 충칭의 중간 지점에 있어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발전이 더디었다. 그나마 1980년대부터 중국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한 다주석각은 다주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전국적인 지명도는 뒤늦게 얻었지만, 쓰촨 일대에서 다주는 일찍부터 유명세를 탔다. '위로는 어메이(峨眉)산, 아래로는 바오딩산'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바오딩산은 '쓰촨의 신령스러운 산'(天府靈山)으로 명성이 높았다. 명·청시대에는 매년 음력 2월9일 천수관음의 생일 전후로 수많은 참배객이 구름 같이 운집했다.
1980년 다주현이 대외개방하면서 다주석각을 찾는 사람은 더욱 다양해졌다. 다주까지의 교통편이 불편하긴 하지만, 관광객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다주석각을 찾는 여행객은 한해 100만 명을 넘어섰다. 연휴 때에는 하루 만여명의 관광객이 몰리기도 한다.
1998년 4월 중국 최고 국가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다주석각을 찾은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은 "다주석각은 예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교육기지로서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장 주석은 석각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문물 보호에 힘쓸 것을 지시했다. 이에 중국정부는 다주석각 재정비에 총력을 기울여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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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수 그린 당안도를 살펴보는 궈샹잉 전 관장. 그는 지금도 베이산 기슭에 있는 자택에 거주하면서 다주석각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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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산석각은 마치 벌집처럼 각기 다른 석각이 줄지어 조성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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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주현 말단 공무원 출신 궈샹잉, 다주석각 가치 널리 알려
다주석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무엇보다 한 숨은 공로자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궈샹잉(郭相潁) 전 다주석각예술박물관 관장이 그 주인공이다.
1973년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30대 중반에 접어든 궈샹잉은 다주현의 말단 공무원으로 부임해왔다. 다주에 온지 얼마 안 되어 궈는 방치됐던 다주석각의 가치를 발견했다.
당시 중국은 '사구'(구사상·구문화·구관습·구습관) 타도에 앞장섰던 홍위병의 난동 때문에 전통문화재의 관리와 보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누구도 구문화라 할 수 있는 유적 관리에 나서지 않았지만, 궈샹잉은 달랐다. 궈는 다주석각이 중국의 국보라 할 수 있을만큼 높은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가 있음을 알아 차렸다.
여기에는 궈의 개인적 취미도 한 몫 했다. 본래 궈는 문혁 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전문학교(中專)를 졸업했다. 역사나 불교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었지만, 예술과 회화를 좋아했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관심은 그를 행동으로 나서게 했다.
궈샹잉은 평일 퇴근 후와 주말마다 다주 곳곳에 흩어진 석각 하나하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한 석각은 직접 그림으로 남겨 세심히 기록했다. 다주현 내에는 1952년 설립된 문물보관소가 있었지만, 다주석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나 연구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궈는 교통도 불편한 오지를 홀로 걸어 다니면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10년이나 지속했다. 도록이나 사진집 하나 없이 오직 지도와 노트, 연필만 들고 나선 힘든 작업이었다. 일부 촌락에서는 실권파와 연계된 불순 관리가 아니냐는 주민들의 의심까지 받기도 했다.
다행히 궈샹잉의 노력은 1980년대 빛을 볼 수 있었다. 개혁개방정책은 전통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고, 다주현 정부도 1984년 다주석각예술박물관을 설립했다. 외로이 작업을 해왔던 궈는 정부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아, 박물관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됐다.
궈가 작은 노트에 손수 그린 당안도는 무려 20여m에 달했다. 다주석각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한 최초의 자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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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에는 수많은 불경이 안치되고 벽면에 1032존의 불상에 새겨진 천불도굴(千佛圖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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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하고 섬세한 관무량수불경변상. 불교 경전인 <관경>을 바탕으로 조각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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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샹잉, 충칭시 직할시 승격 10주년 기념 '건설공신' 선정
궈샹잉이 조사한 곳은 다주 5대 석각만이 아니었다. 그는 먀오가오(妙高)산 전체에 모두 1005존의 석각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공자, 석가모니, 노자가 함께 새겨진 석실이 만들어진 년도가 1144년임을 알아낸 것은 궈였다.
궈는 젠산즈(尖山子)가 다주석각 중 가장 오래된 석각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젠산즈는 650년 당나라 영휘(永徽) 원년에 조성되어, 쓰촨성 동부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불교 석각·석굴이다. 궈가 조사한 슈청옌(舒成岩)석각은 1143년에서 1153년 사이에 새겨졌는데, 도교와 관련된 석각이 426존이나 된다.
2007년 6월 <충칭신보>(重慶晨報)는 "궈샹잉은 자발적인 향토문물연구자로 현·진향·촌 각급 행정단위에 석각보호네트워크를 구성했다"며 "다주석각예술박물관장 재직시 저술·편집한 '다주석각명문록'은 다주석각에 대한 전면적이고 과학적인 최초의 사료"라고 평가했다.
중국 관영 <CCTV>는 "궈샹잉은 20여년간 비바람을 맞아가며 다주석각의 연구와 보호에 힘썼다"며 "조지봉에 의한 바오딩산석각의 조성 비밀, 러산(樂山)대불과 다주석각의 연관성, 불교의 남부 지역 전파 과정, 남방불교예술의 발전과 성쇠 등을 밝혀냈다"고 보도했다.
실제 궈가 직접 그리고 정리한 당안도와 연구자료는 다주석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데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궈의 노력으로 다주석각은 체계적인 학술연구와 과학적인 관리가 이뤄져서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예술로 자리 잡게 됐다.
이런 궈샹잉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7년 충칭시는 직할시 승격 10주년을 기념해 그를 '직할시 건설공신'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8명의 문화선전, 학술이론 공신 중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궈가 유일했다.
한낱 지방문화재로 잊혀질 뻔한 다주석각을 조사·연구하고 보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탈바꿈시킨 이가 궈인 셈이다. 대학을 졸업한 전공자가 아닌 전문학교 출신의 말단 공무원이 이룬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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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장사 전 훠궈에 넣을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아낙들. 훠궈는 매운 탕에 다양한 음식을 넣어 익혀 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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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만 해도 맵고 얼얼함이 느껴지는 충칭 훠궈. 원래 강변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먹던 서민 음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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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맛, 충칭 음식 훠궈
다주에서 충칭으로 돌아오면 어느덧 저녁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된다. 충칭에서 반드시 맛보아야 할 음식은 훠궈(火鍋)다.
훠궈는 탁자 중간에 구멍을 꿇고 냄비(鍋)를 놓아 불(火)로 끓여 먹는 탕이다. 세숫대야만 한 냄비 가운데를 보통 '一'자나 '十'자로 나눈다. 칸막이가 'S'자인 태극 모양과 큰 냄비 안에 작은 냄비가 든 '동심원' 형태도 있다.
뜨거운 땅에 음식 재료를 익혀 먹어 우리의 신선로와 유사하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훠궈의 육수는 아주 맵다. 단순한 매운 맛이 아니라 입안이 얼얼하고 땀을 물 흐르듯 나게 할 정도로 무척 맵다. 육수에 들어가는 매운 맛은 유채 기름과 고추, 산초(花椒) 등에서 비롯된다.
유채 기름은 20여 가지의 한약재를 볶아 우려내어 숙성시켜 홍탕(紅湯)의 주원료가 된다. 고추는 중국에서도 가장 매운 고추로, 충칭 동남부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다. 무엇보다 산초는 얼얼한 맛을 더해주어 홍탕의 정점을 끌어올린다. 훠궈의 맵고 얼얼한 맛(麻辣)에 취하다 보면, 치과에서 마취를 한 것처럼 입술에 감각이 없을 정도다.
본래 훠궈는 밑바닥 서민들의 음식이었다. 충칭은 중국에서 가장 길고 큰 양쯔강(長江)과 그 지류인 자링(嘉陵)강이 만난다. 이 때문에 충칭의 차오톈먼(朝天門)은 내륙 최대 항구로, 송나라 때부터 번성해왔다.
수백 년 전 차오톈먼에서 일하는 사공과 인부는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강변 모래사장에서 음식을 해먹어야 했다. 그들은 간이 부뚜막에서 아란석(鵝卵石)에 냄비를 놓아 값싼 소고기와 양고기 내장을 넣어 먹었다. 강물은 그리 깨끗하지 못했기에 꼭 끓여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로 성장한 충칭 훠궈의 기원이다.
충칭 사람들이 훠궈를 즐겨먹게 된 것은 기후의 영향도 크다. 충칭은 1년 중 해가 뜨는 날이 그리 많지 않고 습도가 아주 높다. 우중충한 날씨와 습한 기후를 이겨내기 위해 충칭인들은 매운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매운 음식으로 먹어 땀을 뺄 경우 관절염과 류머티즘을 예방하고 피부에도 큰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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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화려함을 더하는 충칭의 중심가 제팡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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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우산 케이블카터미널에서 바라 본 제팡베이의 빌딩숲. 충칭의 야경은 중국에서도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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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궈는 먼저 탕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음식점에서 종업원은 어느 정도 맵게 할 것인지 주문 받는다. 매운 맛의 등급은 '아주 맵게'(最辣), '약간 맵게'(微辣), '안 맵게'(不辣) 등으로 나눠진다. 훠궈를 처음 먹는 사람은 전혀 맵지 않은 청탕(淸湯)을 홍탕과 함께 시켜 것이 좋다.
충칭 음식점에서 홍탕은 보통 무료이지만, 청탕은 20~40위안(약 3600~7200원)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탕 안에 넣어 먹는 음식 재료는 식성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충칭인들은 소 천엽, 오리 창자, 민물고기, 미꾸라지, 돼지 뇌, 각종 야채 등을 주로 먹는다.
땅에 넣어 익힌 음식은 꼭 참기름 장에 찍어 먹어야 한다. 그냥 먹을 경우 너무 맵고 얼얼해서 입도 대기 힘들 정도다. 참기름 장에는 마늘과 중국 식초(醋)를 넣어 먹으면 제 맛이 난다.
훠궈는 충칭에서 가장 서민적인 음식으로, 식당은 언제나 손님으로 붐빈다. 충칭 사람들은 술 마시는 문화가 발달해서 식당 안은 언제나 떠들썩하다. 각종 술 먹이기 시합으로 시끄럽긴 하지만, 충칭의 술과 음식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여행Tip 1
다주현청에서 베이산석산으로 가는 교통편은 따로 없다. 택시를 타고 갈 경우 5위안(약 900원) 안팎이 든다. 베이산석각의 입장료는 60위안(약 1만800원)이다. 다주에서 충칭 시내로 돌아오는 고속버스는 오후 4시가 막차다. 돌아오는 시간을 잘 맞추어서 다주석각을 둘러봐야 한다.
# 여행Tip 2
충칭시 중심가 제팡베이(解放碑)의 야경은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다. 제팡베이는 1950년 중국공산당의 충칭 해방 1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제팡베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거대한 인도와 주변 건물이 각기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인구 3200만 명의 대도시 중심가답게 언제나 인산인해의 사람들로 넘친다.
제팡베이에서 멀지 않은 양쯔강 케이블카(長江索道)도 꼭 가봐야 할 명소다. 양쯔강 케이블카는 1987년 완공되었는데, 건설에 사용된 모든 장비와 부품이 중국산이다. 총 길이 1.1㎞로, 위중(渝中)구 신화루(新華路)와 난안(南岸)구 전우산(眞武山)을 이었다. 한 케이블카에 80명이 탑승할 수 있고 양쯔강의 양변을 가로질러 가는데 6분 정도가 소요된다. 승객은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지금도 하루 3만여 명이 이용한다. 이용객으로 따지면 중국 최대 케이블카 노선이다.
최근에는 양쯔강과 충칭시 전경을 조망하는 관광 수단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중국 영화 <저우위의 기차>(周漁的火車) <미친 돌>(渢狂的石頭)> 등에 등장할 정도로 충칭의 명물이기도 하다. 케이블카의 운행시간은 6:30~21:30이고, 이용료는 2위안(약 36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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