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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네

[스크랩] 글렌 굴드와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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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지휘를 하다가 춤을 추기도 하였고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콜롬비아 마스터웍스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1955년 6월 콜롬비아 마스터웍스의 스튜디오에 레코딩 작업을 위해 나타난 글렌 굴드에 대한 유명한 일화이다. 이때 녹음한 것이 그 유명한 명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의견은 너무나 분분하다.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보여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인가 아니면 작곡가, 영화배우, 영화제작자, 작가로 다재다능한 활동을 보여준 예술가인가. 글렌 굴드에 대해 아낌없는 극찬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극히 주관적이고 해괴한 기행, 한정된 레파토리 때문에 피아노를 잘 치기는 하지만 연주자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악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두 동감하는 부분은 있다. '글렌 굴드처럼 자유로운 표현을 구사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라는 것.

굴드는 1932년 9월 25일 모피 중개상인 아버지와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어머니의 외아들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남편보다 9살 연상인 굴드의 어머니 플로라는 꽤 솜씨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는 계속된 유산 끝에 마흔이 넘어 어렵게 얻은 아들을 음악가로 키우고 싶어 했다. 플로라는 굴드가 피아노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자마자 아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작하였다. 굴드는 태교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3살 되던 해 절대음감과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5살 때 작곡 시작을 하였으며, 10살 때 토론토의 로열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피아노는 알베르토 게레로에게서, 오르간은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서, 음악이론은 레오 스미스에게서 배웠다.

굴드는 12살때인 1944년 키바니스 뮤직 페스티벌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참가한 유일한 경연대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 그는 젊은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참가하여 서로 경쟁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어떤 종류의 경쟁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에는 로열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았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서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과 로잘린 투렉(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해진다.

굴드는 1946년 로열 콘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하였으며 다음 해에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포니와 연주하였다. 어떤 비평가는 이 연주에 대해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성공리에 마쳤고 다음 날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마스터웍스 시리즈에 참여하게 되었다. 굴드는 메이저 음반사에서 출반하는 자신의 첫 레코딩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택하였다. 당시만 해도 이 곡은 지루하고 변화없는 곡으로 인식되어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에 끼지 못하고 한켠에 밀쳐져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부터 바흐를 탐닉해 오던 굴드는 자신의 내면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곡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23세의 굴드를 단숨에 정상급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녹음 이래 굴드의 연주일정은 갑자기 불어났고 1957년에는 러시아(당시 소련)에서 2주간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첫 유럽 순회연주를 가졌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에서 연주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으며,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연주 중에 보이는 그의 특이한 무대 매너도 흥분한 청중들에게는 천재다운 괴벽으로 비쳐졌다. 특히 리드미컬하고도 시적인 감흥이 넘치는 글렌의 바흐 연주는 어디서나 청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또한 유럽 순회공연 동안 굴드는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연주하였으며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연주자 못지 않은 나르시시즘의 소유자였던 굴드에게는 친근한 번스타인이나 아버지처럼 자상한 관심을 보여주던 유진 오먼디 같은 지휘자들보다 제왕과 같은 카라얀의 모습이 오히려 동경의 대상이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같은 해 굴드는 바흐의 <평균율 2집>을 녹음하였다. 이 음반에서 굴드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부분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장식음들이나 무한정 자유로운 템포, 전통적으로 레가토로 연주하던 부분을 스타카토로 처리하기도 하고 반대로 코드에서 아르페지오를 시도하는 등 가히 기록할 만한 파격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물론 이 음반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끊임없는 천재다운 기행과 허를 찌르는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굴드의 인기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만 갔다.



굴드의 음악에는 살아 숨쉬는 듯한 생명력이 있고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기괴함과 참신함이 공존하고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평균율'이 주는 지루함을 의식할 수 없게 한 것도 바로 굴드였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자멸하고 있었다. 1955년 뉴욕 데뷔연주를 성황리에 마치고 나서부터 정기적으로 정신분석학자와 신경전문의들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잦은 연주여행으로 유럽 호텔들의 낮은 실내온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이 굴드를 괴롭혔고 비행기 사고에 대한 공포로 비행기 타기를 극도로 기피하였다. 그러던 굴드의 '병'이 1958년경부터는 본격적으로 나타나 완벽한 암기력과 테크닉의 소유자였던 그가 무대에서 미스터치를 보이기도 하였고 급기야는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라는 핑계로 예정되어 있던 연주회를 자주 취소하기까지 이르렀다.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즐겨쓰며 좋아하는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CD318이었다. 굴드와 스타인웨이 사와의 관계는 묘한 애증으로 얽혀 있는데,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건반을 좀더 가볍게 하기 위해서 스타인웨이 사의 전속 조율사를 불렀다. 당시 스타인웨이 사는 글렌과 호로비츠 두사람을 위해서 윌리엄 후퍼라는 조율사를 고용하고 있었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쳤다. 친구 사이라고 해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 병적인 결벽증의 소유자인 굴드에게 이 일이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의 격심한 통증을 호소했으며 왼손의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다음의 연주일정을 모두 취소했으며 스타인웨이 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굴드의 왼팔 마비는 일종의 노이로제 증상이었는데 그외에도 왼편 얼굴의 근육이 경련하는 '틱장애'를 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연주자라도 조금씩 가지고 있는 증세를 그는 크게 확대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스타인웨이 사와의 소송사건은 그의 노이로제 증세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굴드의 콘서트 경력은 19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고 1964년 4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독주회를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공개적인 출연은 하지 않았다. 콘서트 연주에서 이렇게 빠른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연주가로서의 바쁜 생활이 다른 여러 부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는 인식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었다. 사실 굴드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술, 방송, 작곡, 지휘 등을 동등하게 행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는 마치 보드빌배우(vaudevillian)처럼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고 말할 정도로 공연을 지독히 싫어하였다. 그리고 그는 콘서트 홀에서보다도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보다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연주회장과 결별함으로써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에 드는 노력을 절약하였으며, 이 모든 열정 전부를 레코드 제작에 투자하였다. 굴드는 흔히 우리가 좋지 않은 의미로 이야기하는 '짜집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의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 '짜집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1981년 굴드는 같은 작품을 다시 레코딩하지 않았던 관례를 깨고 26년 전에 처음으로 녹음하였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레코딩이다. 데뷔 당시의 충격적인 반응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이 음반에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첫번째 음반에서는 엄청난 빠르기와 비할데 없는 리듬감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 두번째 음반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을 내적인 성숙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굴드의 음반목록 처음과 끝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과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 역시 처음과 끝이 동일한 아리아가 위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30개의 변주곡이 연주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하여 볼 때 굴드의 생애가 이 곡의 구조와 유사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레코딩 작업만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온 그는 레퍼토리 또한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거부한 작곡가들도 있었는데, 쇼팽과 슈베르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그가 가장 중요시하고 많은 음반을 남긴 작곡가는 바흐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바흐 이전 영국의 작곡가인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는데, 이는 이들 작곡가들 곡의 연주에서 바흐 곡과는 달리 자유로운 익명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반도 상당수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특히 베토벤의 경우, 초기 작품과 말년의 소나타를 즐겨 연주하고 높이 평가하기는 하였지만 그 나머지 작품 중 상당수의 곡에 대해서는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 베토벤 이후 19세기 초반의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혹평을 하였는데 그 시기의 쇼팽, 슈만, 리스트 등의 곡에 대해 "의미없는 극적인 제스처와 과시벽으로 가득차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기 낭만주의 작품과 현대 음악에 대한 굴드의 열정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현대적 어법을 사용한 다수의 현대곡을 작곡한 바 있으며 현대 음악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확한 것이었다. 또한 굴드 이전에는 거의 사장되어 있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그리그 등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피아노 작품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위대하다. 물론 이들 낭만주의 곡과 현대 음악에 있어서도 굴드는 작품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흐적인 맥락에서 지극히 개성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선보이기는 하였지만.

죽기 몇 달 전 토론토 심포니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지휘자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던 그는 너무 자주 신경증적인 '가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이 왔을 때 의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급기야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뇌일혈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굴드의 음반을 들어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와 호로비츠를 연상시키는 영롱한 트릴, 때때로 어이없이 빠르거나 혹은 느린 템포, 지나칠 정도의 논-레가토 주법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결코 큰 음량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바흐시대 악기의 작고 변화가 없는 소리를 염두에 두고 연주를 했던 것 같다.

현대 피아노를 사용하였고, 주법도 바흐시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굴드가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은 그 자체로 바흐의 연주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흐 음악에 잠재하는 본질을 정확히 이끌어 내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자유롭게 바흐를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굴드 외에 누가 또 있을까.

굴드에 대해선 '신경쇠약 직전'이라고 표현하기가 오히려 어색하다. '신경쇠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예술을 위해 미쳤었는지도 모른다.




출처 : Easy의 고전음악방
글쓴이 : Eas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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