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皇龍寺址)에 있었던 목탑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황룡사 장육상(丈六像),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신라의 호국 삼보(三寶)로 간주된 탑이다.
『삼국유사』에서는 643년(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법사(慈藏法師, 590~658)의 요청으로 탑이 만들었다고 하였다. 자장법사는 유학 중에 어떤 신인(神人)에게서 ‘신라의 왕은 여인이 까닭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며, 9층탑을 세워야 나라가 평온해진다’는 말을 듣고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탑의 건립을 요청하였다. 목탑의 9개 층은 신라 주변의 9개 국가, 곧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을 가리키며, 탑을 세움으로써 이들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년)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월 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완공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황룡사 9층 탑지 심초석 안에서 발굴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 의한 것이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년)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침입으로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려서 그 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신라황룡사찰주본기」에 의하면,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건립되었다가 718년(성덕왕 17년)과 720년(성덕왕 19년)에 중수된 뒤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대에 다시 기울어졌다. 이에 872년(경문왕 12년)에 탑을 헐고 다시 중수해 873년(경문왕 13년)에 마쳤다. 이 과정에서 872년 11월 25일 박거물(朴居勿)이 「신라황룡사찰주본기」를 지어 사리내함의 안팎에 새겼다.
이는 심초석 안의 사리공에 봉안되었는데, 1238년(고종 25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목탑이 불탄 뒤에도 심초석 안에서 보존되었다. 1964년 이곳에 위치한 농가가 철거된 뒤, 같은 해 12월 심초석 안의 사리함이 도굴되었다가 1966년 수습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었다. 1972년 복원작업을 통해 찰주본기 내외의 명문을 거의 판독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약간의 세부적 차이는 있으나 『삼국유사』의 황룡사구층탑 내용과 대체로 유사하여 자료적 가치가 증명되고 있다.
황룡사는 성전사원(成典寺院)으로서 그 규모와 격에 있어 신라 제1의 사찰이며, 역대 왕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100명의 고승을 모아 이곳에서 백고좌강회를 열었다. 이러한 황룡사의 중심이자 호국의 상징인 9층 목탑 역시 웅장한 규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9층까지의 높이는 당척(唐尺)에 기준하여도 53m 이상이며, 조성 당시의 동위척(東魏尺)으로 계산하면 80m 이상이 되는 초대형 건축물인데, 이는 아파트 30층에 맞먹는 높이이다. 황룡사 장륙상(丈六像) 역시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존불과 좌우의 보살로 구성하였으며 그 무게가 3만 5천근이라 하여 유례없이 거대한 입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장대한 건축물을 조성한 것은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의 의지와 역량을 표하는 의도로 보는 시각이 있다. 현재 황룡사 9층 목탑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가 복원을 추진하여 2035년 종료 예정이고, 전시관 건립 및 황룡사지 정비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출처 국사출판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