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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하워드진 타계…미국민중사 집필 ‘진보진영 교과서’로

[한겨레] 하워드진 타계…미국민중사 집필 ‘진보진영 교과서’로
역사학자 하워드 진 타계

1264671279_6000397067_20100129.JPG» 하워드 진 보스턴대 명예교수

미국의 급진적 역사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의 상징이었던 하워드 진(사진)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27일(현지시각) 숨졌다. 향년 88.

<에이피>(AP) 통신은 캘리포니아주를 여행하던 진이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딸의 말을 전했다.

1980년 불과 5000부를 찍었던 그의 대표저서 <미국 민중사>는 기존 미국사의 시각과 방법론을 완전히 뒤바꿨고, 이후 미국 내 학교뿐 아니라 전세계 진보진영의 대안교재가 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콜럼버스의 인디언 사냥으로 첫 장을 시작하며, 진은 강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인디언·흑인·여성·노동자 등의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다. <오만한 제국>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등의 저서와 3편의 희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2년 뉴욕에서 유대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하며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컬럼비아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펠먼대에선 흑인여성 제자들과 함께 민권운동을 벌였고 1964년 옮긴 보스턴대에선 베트남 반전운동의 선두에 섰다. 은퇴 뒤에도 인권운동을 위해 거리 팻말시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같은 이마저 평가절하하는 그의 시각은 자유주의자들도 불편해했다. 자유주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2세는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논객”이라 말했을 정도다. 진 스스로는“나는 객관적이거나 완벽한 역사책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전통적 역사학에 대응하는 새로운 역사학의 첫 장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일국주의가 강화된 2000년대, 진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2003년까지 100만부 팔렸던 <미국 민중사>는 2009년 200만부를 돌파했고, 지난해 미국의 <히스토리 채널>은 책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맷 데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스타들이 작품이나 앨범에서 진에 대한 존경의 뜻을 바쳤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을 강력히 비판해온 그는 지난해 말,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등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 한국 내 반민주적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진의 마지막 글은 지난주 <더 네이션>에 실렸다.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며 ‘평범한 대통령’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민운동이 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평범한’은 ‘위험한’이 될 것이다.” 촘스키 교수는 이날 “미국 지성과 도덕 문화에 놀라운 기여를 했다”고 그를 기렸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기사등록 : 2010-01-28 오후 07:23:53  기사수정 : 2010-01-28 오후 10:00:38


[경향]‘사회적 소수의 시선’ 실천적 지식인 영원히 잠들다

ㆍ‘미국 민중사’ 출간 진보 역사학자 하워드 진 타계

“올해 계획이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글쓰기와 단순하고 재미있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거지요. 글의 주제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원로 역사학자 하워드 진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27일(현지시간)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향년 87세. 불과 한 달 전 경향신문 신년 인터뷰를 위해 접했을 때만 해도 올해 활발한 활동을 다짐하던 그였다. 건강하고 밝은 음성이었다. 진보적 지식인의 토양이 척박한 미국 사회에서 ‘싸움꾼’으로 알려진 진은 의외로 위트가 넘치는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비록 우리가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못하더라도 내 주위의 작은 세계만큼은 충분한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서 “유머 감각을 지닌 좋은 친구들과 가급적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는 생활철학을 들려주었다.

진은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와 함께 미국 내 진보적 지식인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주류 언론과 학계에서는 이단으로 여겼지만 원주민(인디언)·흑인·백인 블루칼라·여성의 육성으로 구성한 저서 <미국 민중사>(1980)가 지난해 말 200만부를 돌파하며 대중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살육자로 처음 지목한 것도 그였다.

뉴욕의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진의 일생은 광기의 20세기를 구분지었던 몇가지 사건으로 틀이 잡혔다. 브루클린 부두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진은 나치에 대한 적개심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 B17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종전 9년 뒤 자신이 네이팜탄을 투하했던 프랑스 루아얀 지역을 방문한 뒤에야 독일군뿐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희생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평생 반전 평화론자로 베트남전에서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군사주의적 개입에 줄곧 반대해왔다.

27세 늦깎이로 뉴욕대에 입학하고,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968년 흑인 민권운동에 동참한 게 빌미가 돼 재직 중이던 애틀랜타 스펠만대에서 쫓겨났다. 이후 보스턴대로 옮겨 88년 은퇴할 때까지 강단에 서는 한편, 역사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세 편의 희곡과 <베트남, 철군의 논리> <불복종과 민주주의> <달리는 열차에서 중립은 없다> 등 수십권의 저서를 남겼다.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 <컬러 퍼플>의 저자 앨리스 워커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이 그를 사숙했다. 부음을 접한 촘스키는 “진은 미국의 양심을 건설적인 방식으로 바꿔놓았다”면서 애도를 표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는 모두 조직적인 시민운동으로 이뤄졌다. 버락 오바마도, 미국의 제도정치도 아닌, 사람이 희망”이라던 그의 말이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그 말이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워싱턴 | 김진호 특파원 jh@kyunghyang.com
입력 : 2010-01-29 00:16:37ㅣ수정 : 2010-01-29 00:1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