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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0년 걸려 쓴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일제 때 재벌·경찰·목사는 지금과 많이 다를까
[서평] 10년 걸려 쓴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09.07.17 10:51 ㅣ최종 업데이트 09.07.17 10:51 김갑수 (kim gabsoo)

"동경에서 학병 권유 연설을 했다는데?"

"동경을 가서 보니 총독부 출장소가 나와 있었고 장학회가 있었습니다. 두 기관에서 연설할 사람을 자기들 멋대로 지정하여 명치대(明治大) 강당으로 데리고 가더니 누구누구 이름을 부르면서 연설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연단에 올라갔으나 원래 연설을 할 줄도 모르고 너무나 양심에 가책을 받아 1분도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연설 요지는?"

"거기서 무슨 딴 말을 하겠습니까? 시국에 비추어서 불가피하게 한 일이니 출정할 각오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양심에도 없는 말을 하였지요."

 

"명치대 강당에서 강연을 한 인물들은 누구누구였나?"

"이성근(매일신보 사장/편자), 최남선, 이광수, 본인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이었습니다."

 

위의 대화는 1949년 2월 1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조사관 서상열(徐相烈)의 질문에 피의자 김연수(金秊洙)가 답변한 신문조서의 내용 중 일부이다. 이 기록은 일제 말기 민족의 공분을 자아냈던 저명인사들의 학병 권유 연설 전말을 증언하고 있다.

 

2001년까지 존재한 반민특위 구속 1호, 박흥식의 동상

 

  
<반민특위 재판기록> 겉그림.
ⓒ 선인
반민특위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선인·2009· 전 4권·정운현 편역)은 이런 희귀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하고 있다.

 

김연수는 일제 때 호남지방의 대지주로 경성방직을 경영한 사람이다. 그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일찍부터 친일행각을 자행했다. 그는 1940년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고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국방헌금을 납부하면서 군수산업에 가담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단체 간부로도 활약한 그는 8·15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났다.

 

문제는 이런 인물이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득세하여 전국경제인협의회(전경련의 전신)의 회장(1961년)을 지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의 형 김성수는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지내는 등 그의 일족은 마치 양심적인 민족 자본가처럼 행세했는데, 특히 차남 김상협은 16대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에는 맹렬한 친일파였던 화신백화점 사주 박흥식의 재판기록도 담겨 있다.

 

"박흥식의 비행기회사 설립으로 인하여 민중이 받은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받은 피해를 일일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수만 명이 불안과 공포에 싸여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박흥식에 대한 원성은 안양 천지에 가득했습니다. 주민이 살고 있던 집도 비행기공장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당장에 철거해야 했습니다."(증인 이창희 증언)

 

박흥식이 행한 친일행각은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창업, 경영한 그는 평소 일본인 총독에게 '자부(慈父)'라고 호칭할 정도로 아부와 증뢰(贈賂)에 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기록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최대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정· 경· 언 유착이 다름 아닌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

 

1925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창업, 사장이 되면서 당시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전중무웅(田中武雄)과 친교를 맺어 일본 각 제지회사와 특약으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권취지(卷取紙)'를 직수입하는 특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국내에서 발간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지성에 결함이 있는 박흥식은 아부와 증뢰에 능한 재능이 있었으며 한국 침략, 착취의 본거지인 조선식산은행에서 70만 원의 신용대부를 얻게 된 것도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다... 안양공장이 일부 작업을 개시하기까지는 조선군사령부와 총복부의 힘을 빌어 조선직물회사 및 동양방직 안양공장을 접수한 것은 물론... - <반민특위 재판기록> 2권 20~24쪽

 

박흥식은 반민특위 구속 1호 인물이다. 그런데 서울 관악구에 있는 광신고등학교에는 지난 2001년까지 초대 이사장 박흥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이후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학교 측이 자진 철거함).

 

60년 세월,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여

 

위 두 사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반민특위가 와해된 1949년의 시점에서 60년의 세월이 진행된 오늘의 상황은 그리 호전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흔히 대한민국의 불행은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고들 한다. 기실 청산은커녕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그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주류세력이 되어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적반하장으로 탄압하기도 한다.

 

그들은 친일청산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색칠하기도 한다. 게다가 친일 행위를 마치 순교자적인 행위로 미화하는 사람까지 있다. 또한 비록 한때 친일을 했더라도 민족에 대한 공로가 많으니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는 공과론도 있으며, 친일청산은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소모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친일청산 문제가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의해 이용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음해론도 있다. 또한 엄밀히 말해 그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민족 공범론'도 활개를 친다. 지나간 일을 캐서 상처내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고 위선적으로 포장하는 주장도 있다.

 

대항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유무형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특위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친일 청산을 기피한 것이다. 당시 이승만의 담화에는 친일파들의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지금 국회에서는 친일파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만들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의 의의와 가치

 

친일파들은 일단 증거가 없을 경우 자기의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친일의 증거를 없애기 위한 그들의 공작은 집요하게 진행되어 왔다. 반민특위가 조사한 인원은 총 668명인데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은 1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64명뿐이라고 한다. 그나마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90% 이상의 기록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친일 관련 사료는 모진 수난을 받아 왔다. 모 공공도서관에 보관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일부가 예리한 칼로 도려내지기도 했고,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친일파 관련 서적의 본문이 새까맣게 지워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친일의 죄상을 은폐하고 제거하려는 어두운 손의 책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발간된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의 의의와 가치는 실로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64명에는 친일경찰을 비롯해 습작자, 도회의원, 중추원참의, 언론인, 기업인, 군수업자, 종교인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른바 친일파라는 사람들이 식민지 시대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가 있다. 또한 해방과 함께 그들의 심경이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때의 경찰이나 목사· 승려가 오늘의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반민족행위 피의자 중에 이중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만보산사건(1931년 중국 지린성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과 중국인 간 벌어진 유혈 충돌, 필자 주) 당시 가로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잉크를 뿌려 표시한 후 검거했다고 한다. 최근 한국 경찰이 시위 시민에게 색소를 쏘아 검거한 것과 아주 흡사해서 흥미롭다.

 

피의자 전필순은 중일전쟁 때 예수교 목사로서 국내 각지에 순회하여 신성한 교당에서 일본 침략 전쟁을 정의라고 하였으며, 정의는 반드시 필승한다는 강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전쟁 협조를 강조한 사실이 명확함(3권 405쪽)

 

피의자 한능해는 15세 때 삭발, 승려가 되었다가 1년 후 다시 환속...전당포, 가구점, 주물공장 등을 경영하다가 40세 때 돌연 삭발 다시 승려가 되어 인천시 간석동에 이주하여 약사암을 창건하고 신위를 얻으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일본인 경영체인 호국사에 소속되어 신위를 얻어... 수천의 신도들에게 친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황민화운동에 충성을 다하고...(4권 159쪽)

 

대가와 보상이 없는 작업, 열정과 자존심 없이는...

 

반민특위의 재판기록 원본은 일반인들이 해독할 수가 없다. 거의 한자투성이인 데다가 손으로 흘려서 쓴 초서체 비슷한 글씨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시대의 용어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이 기록이 작성된 1949년의 언어는 지금과 60년의 격차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작업은 근· 현대사는 물론 국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지식만 있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작업에는 현실적인 대가와 보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은 진실에 대한 사랑, 인간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민족의 자존심과 관련된 사명감 등이 있지 않고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본다.

 

편역자 정운현은 지난 20년 동안 친일문제에 천착해 온 학자 겸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출간한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17권)의 원문을 일일이 쉬운 우리말로 풀고 더러는 주석까지 붙여 이 책을 내놓았다. 그러는 동안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고 한다.

 

역사는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진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갚지도 못할 은의를 입었다. 그의 열정과 노고에 대가와 보상이 주어지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