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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청소년 문학

이홍섭/ 강릉, 프라하, 함흥/ 문학동네

  

 강릉, 프라하, 함흥

 

 

 

카프카는

살아서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

뾰족탑의 이끼와

겨울 안개가

그를 기억한다

 

내곡동 지나

보쌀 지나

남대천 둑방을 따라

바다로 간다

안목에 가면

바다가 둥지고, 바다가 무덤인

갈매기들이 산다

 춘천, 프라하, 함흥

 

 

 

이렇게 안개가 내리면

귀가 커 외롭던 카프카가 좋고

모르긴 해도, 당나귀를 닮았을 백석(白石)이 좋다

 

멀리 불빛, 불빛 같은 것도 잠기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겸손하게 사라질 때

언덕 위 자취방에 돌아와

주인집 노부부가 아끼는 노란 국화를 바라보는 일도

 

순개울 바닷가

 

 

바다처럼 상처가 넓어지면

아득히 내가 떠다니고

그러면 까마득히 내가 보이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이

마음을 달래줄 때가 많다

 

순개울 바닷가에 오면

넓디넓은 바다 위로 두런두런 섬들이 모여들고

내 삶의 행로가

끼룩끼룩 보이기도 한다

 

견딜 수 없는 연민이라는 게 있다면

순개울 바닷가를 달려볼 일이다

와서 반쯤만 젖어볼 일이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마을 쪽으로

마음의 반을 돌려놓고

 

 

 

 

 

자작나무 숲

 

 

내 멀미의 끝에는

언제나 눈부시게 환한 자작나무 숲이 있었지

자작나무......

한순간에 온몸을 태워버린 불꽃나무가

힌 수의를 입고 있는 듯

자기의 죽음을 오랫동안 애도하고 있는 듯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온몸에 칭칭 붕대를 감고 있는

내 청춘의 흰 숲, 자작나무떼

 

언제나 가득히 비린내를 풍기던

염소 창자 속 같은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는 알고 있을까

멀리 끝에서 만나는

언제나 거기 눈부시게 환한 자작나무 숲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어느새 줄줄줄 전신을 감아오는

자작나무, 그 하얀 붕대의 비밀을

집 떠난 새털구름은

알고 있을까

 

 

 

황접가

 

 

내 사랑이

십자가처럼 무거울 때

춘천 향교 옆 은행나무 두 그루는

여전히 노란빛으로 환했다

 

열병처럼 환한

은행나무 두 그루 사이에

노란 길이 새로 열리고

그 길로 내 사랑도 얼른 지나갔으면

나비처럼 가벼웠으면

꿈꾸기도 했다

 

어쩌지 못하는 사랑에

고개 숙이고 걸을 때

혹은, 춘천 향교 옆 은행나무 두 그루 사이를

먼산 보듯 지나갈 때

휘파람처럼 쏟아져 내리던

노란 나비떼

 

 

 

두 갈래 길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은 안목 가는 길

다른 한 길은 송정 가는 길

 

한 길은 외로움을 비수(匕首)처럼 견디는 길

다른 한 길은 그대에게로 가는 먼 길

 

그 길들 바다로 흘러가기에

이것이 삶인가 했습니다

찬물에 밥 말아 먹고

철썩철썩 달려가곤 했습니다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로 가면 그대가 아프고

다른 한 길로 가면 내 마음이 서러울까봐

갈림길 위에 서서 헤매인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길 아닌 길 없듯이

외로움 아닌 길 어디 있을까요

사랑 아닌 길 어디 있을까요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설국(雪國) 간다

 

 

마른 비 내리다

그치고, 어느새 눈발이 친다

빗방울 세던 마음이

자꾸만 길을 잃는다

 

멀리 가면

거기가 내 마음이라고

무량무량

흰눈은 쌓이는 걸까

 

허겁지겁 눈을 먹는 마음이

설국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