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를 봅니까? >>
송미경/ 문학동네/2020.2.10 초판
1.신발이 없다 - 미발표작품. 소설집이라는 이름으로 해서 발표했던 작품을 엮어서 책으로 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걸까. 예를 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자기 작품을 발표한 것 중에 엄선을 해서 만드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이런 경우는 이게 뭐지 싶다. 작가의 대부분의 글은 '비틀어 보고 상상을 덧붙이기'라는 것은 알겠는데 의미 맥락도 없이 신발 쇼핑 중독에 대한 이해를 해줘야 하는 심리 상담사가 되어야 하나? 독자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부모가 없거나 한부모거나 친척집에 얹혀 사는 청소년들이 매양 이럴까. 조금 아쉬운 것이 아니라 많이 아쉽다. 작가가 짧은 순간 반짝 아이디어로 글을 쓰는 것이, 그것도 단편을 마구 써내는 것 같은 글은 사양하고 싶다. 표제작이 두번째로 나오는 것은 이미 발표한 적이 있어서 그러한 것일까.
2. 나는 새를 봅니까? -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소통의 부재,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묻고 있지만 사라지는 것은 무엇을 상징할까. 꿈을 쫒아가면 현실에서는 사라지는 것일까? 현실 적응이 어려우면 그를 품고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까. 너무 고전에 가까운 방식이라고 꺼리는 것일까. 현실을 놔버리는 꿈이라면, 위험하지 않을까. 더구나 독자가 청소년일 경우는 더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자살, 사고, 죽음, 이세상에 적응 불능을 상징하는 듯해서 '돌씹어 먹는'것보다 더 위험해보였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군데 군데 흘려놓은 듯한 뻔한 맥락을 어렵게 보이게 한 것처럼 읽는 내내 느껴져 답답하고 갑갑했다.
3. 나지않는 냄새 - 이 작가의 트랜드같다. 일상적인 것을 일상적이지 않게 느끼고 냄새맡고 글로 만드는 것이 말이다. 문학은 일상을 바탕으로 그 속에서 긍정의 힘을,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치밀하고 교묘한 장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편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뭘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청소년 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주인공이 결국 맡게 된 그 냄새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개인마다 다르고 어른이어도 민감한 사람과 청소년이어도 둔감한 아이들이 있는데 그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할 정도의 냄새라면 청소년의 희망도 꿈도 아닌 기성세대의 썩은 냄새라는 것인데 그게 왜 달콤하기까지 할까? 돈 맛, 권력 맛, 권위 맛 이어서 그럴까. 냄새에 무관해진다는 것은 뭘까. 그런 맛조차 느끼지 못하고 고민하지 않고 갈등하지도 못한 체념한 인간 군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더구나 윗층이 냄새의 근원이었다면 도대체 이웃과의 고립, 단절이 주는 냄새라는 것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게 왜 청소년들에게만 구토를 하게 하는지. 대상을 확정하고 글을 쓰다보니 이런 것인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4. 겨울이 오기전에 - 담보 보증을 해줬다가 배반을 당하고 중심에서 쫒겨난 변두리의 삶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이 책가방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삶의 중요부분은 동생 돌봄으로 날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유명 작가 외삼촌이 세상과는 맞지 않는 선물꾸러미 공세는 현실을 알지 못하는 배부른 작가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유명세를 타고 부자가 되면 현실을 정확하게 읽을 수 없는 짐작으로, 현실 안이 아니라 어쩌다가 잠깐 쉴 수 있는 여행이라는 것을 일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보여주고 있다. 달콤한 외삼촌 편지 위에 눈이 쌓여 겨울이 온 것을 아는 이 아이들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별개의 세계에서 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제목에서 주인공의 갈등을 말하는 것일까? 겨울이 오기 전에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일까. 잃어버린 그 중심에는 다다를 수 없음을 끝문장으로 마무리 하고 있어서 더 절망적이다.
5. 나를 기억해? -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할 수 없는 것일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간은 수많은 모습을 갖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청소년 시절은 보여지는대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고 실제 그렇게 대부분은 살아가고 있다. 소라와 효주와의 삼각관계에서 그 소라 입장을 우리는 얼마나 세세하게 알 수 있는지, 그리고 소라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지한 대화한 번 나눠주지 않는 효주와 승우가 꽤 잔인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후회스런 사과를 해줬더라면 소라도 힘내서 살지 않았을까. 너무 힘든 현실이지만 그래도 중심은 잃지 않고 살아갔을 것 같다. 말로 하기 어려우면 편지라도 있는데 왜 하지 않았을까. 우리 안에 갖고 있는 편견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무서운 해악인지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다.
6. 마법이 필요한 순간- 6년이 순간이었겠지.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 사람마다 있기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만의 마법을 쓰고 살지 않을까. 선생님에게 야단 맞는 아이가 <<마법의 설탕 두 조각>>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는 설정이다. 고3이고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보이는데 주마마다 모임과 알바를 다 하게 한다고? 인문고에서?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작품 속에서는 알 수 없는데 그 아이만 그럴 수 있다는 설정이 몰입을 방해했다. 우리 모두 살면서 순간순간 마법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