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를 위하여

하종강- 식상하지만 강조해야 하는 노동기본권

연둣빛 초록(초록샘) 2010. 3. 9. 21:48

식상하지만 강조해야 하는 노동기본권

“유럽이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보도다. 한국 언론의 표현이 그렇다. 참으로 절묘한 단어 선택이다. 몸살감기는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친숙한 병이다. 찬바람을 쏘였다든가 격무에 시달려 피곤했을 때도 감기몸살 증상이 종종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들이 그 원인에 일상적으로 노출돼있기 때문이다. 감기 원인균은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다가 사람들이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 체력이 떨어지거나 하면 각종 증상으로 우리에게 주의 신호를 보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마치 감기처럼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다. 오죽하면 그 권리를 헌법상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했을까? 흔히 ‘노동3권’이라고 부르는 권리를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직을 만들 권리를 갖는다(단결권), 둘째,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같이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단체교섭권), 셋째, 노동자들은 그렇게 요구하다가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경제적 손실을 발생시키며 파업할 권리를 갖는다(단체행동권). 결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합법적으로 손해를 끼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니, 세상에 이렇게 살벌한 권리가 없다.

이상한 것은 그 권리가 헌법상의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OECD 등 국제기구는 대한민국에 가입 조건으로 교사와 공무원에게도 노동3권을 보장하는 노동법 개정을 요구했고, ILO는 한국 정부에게 소방관과 교도관들에게도 단결권 등 노동기본권을 보장할 것을 여러 차례나 권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경쟁 상대국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려는 선진국들의 음모라거나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학자도 있었지만, 곡학아세(曲學阿世)와 혹세무민(惑世誣民)도 그 정도면 선수급이다. 노동3권 조항을 헌법에 명시하지 않은 나라들은 오히려 노동기본권이 너무나 당연한 자연법적 권리이기 때문에 굳이 명문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철도나 자동차 등 단위 노조의 파업에 대해서도 장관들이 여럿 모여 담화를 발표하고, 기업 광고비로 운영되는 언론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등 온 나라가 마치 국운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우리 시각으로는 항공, 철도, 버스, 해운, 세관ㆍ세무, 국립병원, 국공립학교, 중앙ㆍ지방정부, 법원, 은행, 호텔 등 거의 모든 부문의 노동자 수백만 명이 동시에 파업을 벌이는 유럽 나라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라는 말을 듣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회사 경영진과의 긴급 회동을 통해 사업장 시설의 유지를 요청하는 등 노조 입장을 지지한 것을 계기로 파업이 진정될 조짐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법과 원칙에 따른 엄단을 거듭 강조했던 지난 철도노조 파업 당시 우리 사회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당혹감마저 느껴진다.

경찰청장 출신이 사장으로 있는 철도공사에서는 지난 파업 뒤 약 11,000여 명의 직원에 대한 징계처분이 진행되고 있다. 관리자와 조합원 등 직원 수백 명이 업무를 손에 놓은 채 전국에서 열리는 수십 개의 징계위원회에 매달려있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일상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파업이 경제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호한 각종 경제지표들에도 불구하고 양극화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통계들은 우리 사회 노동기본권이 심각하게 위축됐다는 증거다. “한국 노동운동은 지나치게 투쟁적이어서 경제성장의 걸림돌”이라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오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 집 아이들조차 내 강의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핀잔을 준다. “아니, 이 식상한 제목은 또 뭐야?” 그 식상한 노동기본권 이야기를 평생 하다가 죽어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201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