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과 우리나라- 정태인
스웨덴 모델의 붕괴와 부활, 그리고 한국
정태인(경제평론가)
(저는 결코 스웨덴 전문가가 아닙니다. 일주일 갔다 오고 한두달 공부를 했다 해서 어떤 나라를 안다고 한다면 그건 선무당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글이 바로 그렇습니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스웨덴 논쟁에서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 또한 혹시 독자들을 호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그러하듯 우리나라에 관한 생각을 스웨덴에 투사하는 오류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신정완교수, 조영철박사의 글을 꼭 같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온갖 경제학 이론이 다 등장하기 때문에 어려우실 겁니다.)
“스웨덴 모델은 왜 실패했는가?”
마이드너가 비통한 마음으로 위 제목으로 글을 쓴 때는 1993년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내내 인플레이션의 문제를 노정하던 스웨덴은 그예 1991년 통화위기를 맞았다. 1984년에서 94년까지 미국의 1인당 실질 GDP는 3.0% 증가한 반면 스웨덴은 1.4%에 머물렀다. “스웨덴 병”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미국과 스웨덴의 주류경제학자들은 앞다퉈 ‘복지국가의 사망’을 선언했다. 그들에 따르면 스웨덴 등 북유럽의 평등주의와 그 결과물인 ‘지나친 복지’가 노동자들이 일할 유인을 없애고 도덕적 해이에 물들게 했으니 망할 수 밖에 없다. 공짜 점심(예컨대 월급의 80%에 해당하는 장기 실업수당)을 주는 데 왜 일을 할 것이며 병가를 내도 조사를 하지 않으니 툭하면 집에서 쉬는 게 당연하다도덕적 해이). 소련-동구가 그렇게 망했는데 북구사회주의는 또 어디 가겠는가?
미시논리(이기적 인간의 행동 원리)로 보면 그럴듯하고, 또 주위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어서 바로 수긍할 수 있는 이런 주장은, 훗날 린더트에 의해서 철저히 실증적으로 반박되었다. 현실에서도 스웨덴은 95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3.1%를 성장해서 미국의 2.8%보다 높은 성장률을 거둠으로써 ‘부활’하게 된다. 물론 임금격차 등 각종 평등 지표에서 스웨덴은 여전히 수위를 달리는 반면 미국은 선진국 중 최하위권이다.
그렇다면 지난 번에 살펴본 렌-마이드너 모델은 왜 70년대 중반부터 작동하지 않았을까? 또 90년대 중반 이후에 다시 효율과 평등의 균형을 찾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첫 번째 원인에 대한 마이드너 스스로의 진단은 이렇다.
우선 인플레이션 유발 정책(네번에 걸친 대규모 평가절하 등)으로 이윤은 급증했으나 투기에 의해 자산가격이 폭등하고 경쟁력이 저하에서 결국 성장이 정체되었다. 반면 원래부터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고안되었던 연대임금정책은 효력을 상실했다. 그는 첫 번째 이유로 그 스스로 심혈을 기울였던 동일노동가치-동일임금이라는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데 실패했다고 자책한다. 기업가 집단이 중앙교섭을 거부하면서 기업의 이윤격차가 임금격차를 낳았고(효율임금의 적용) 노동자의 연대는 훼손되어 임금부상(wage drift)과 와일드캣 파업이 빈번해졌다. 마이드너의 확신대로 임금격차와 노동자 간의 경쟁은 자본가의 통제 능력을 극대화한다.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최저임금법 등을 법제화하고 임노동자기금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이것은 곧 사회적 합의 모델이 붕괴한 것을 의미했다.
마이드너는 애써 희망을 찾는다. “노동계급을 동원할 수 있는 역사와 전통, 이데올로기적 힘과 지도자의 능력, 그리고 다른 계급에서 동맹을 찾아내는 능력이 사회민주당이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했다”. 스웨덴 사회주의가 다시 일어서려면 “스웨덴 노동운동이 원래 모델을 회복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져야 하며 여전히 연대임금과 집합적 자본형성이 그 핵심이다. 무엇보다도 “도덕적 가치에 기초한 사회라는 개념은 비인간적 시장의 힘에 의해서 절멸되기에는 너무나 고귀하다”
렌-마이드너 모델의 붕괴
비전문가로서 단언하건대 렌-마이드너 모델은 훗날 단순화된 케인스 모델이 아니다. 20-30년대의 케인스의 정책 처방만 놓고 본다면 70-80년대 스웨덴 좌우파 정부의 정책이야말로 케인스주의에 가깝다.
예컨대 위기 시의 평가절하 정책이라든가(물론 케인스의 주장은 처칠 정부의 금본위제 집착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유효수요 부족을 메꾸기 위한 재정확대 정책이 그러하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금융세계화와 기술혁명이라는 조건에서 이런 정책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으며 대내적으로는 과거의 스웨덴 모델, 즉 노조나 기업가 등 주요 행위자들의 행동양식과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점에서 70-80년대의 정책은 대위기를 낳았다.
분명 관대한 복지제도가 이미 70년대부터 노동규율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국제분업의 측면에서 포드주의가 세계적으로 일반화하면서 스웨덴의 철강, 조선산업이 일본, 그리고 뒤이어 한국 등에 밀리기 시작했다. 장기적인 타개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부르주아 연립정부나 사민당 정부가 모두 선택한 것이 대규모 평가절하정책이다. 76-82년에 집권한 부르주아 연립정부는 사양산업에 대한 보조금과 고용유지지원금도 지급했다. 이 모두 인플레이션 억제와 생산성 향상(즉 구조조정)을 통한 완전고용 달성이라는 렌-마이드너 모델과는 정반대의 정책이다. 대규모 보조금이 가져온 재정적자는 공공저축의 증대라는 또 하나의 축도 무너뜨렸다(<9월호 그림 렌-마이드너 모델 참조).
인플레이션은, 어쩌면 당연하게 렌-마이드너 모델을 붕괴시켰다. 자본자유화와 금융자유화(특히 85년의 대출상한규제 철폐), 조세개혁(특히 91년 이자에 대한 조세감면)은 전반적 인플레이션을 넘어 폭발적인 거품경제를 불러 일으켰다. 평가절하로 인한 무역흑자에 대해 불태화정책(통화환수)을 쓴다면 수출-내수 부분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수출분야의 남아도는 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더 쏠리게 만든다. 이 상황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 나가면(투기공격) 바로 외환위기이다. 변동환율제 하에서 외자를 붙잡기 위해 이자율을 무려 500%까지 올려도 이 상황을 막지는 못했다.
“스웨덴 모델의 부활?”
그렇다면 지난 10여년의 성장률 회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장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수없이 많고 더구나 인구 900만명의 소규모 수출경제는 대외 조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번의 금융위기가 스웨덴에 얼마나 타격을 줄지도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다.
90년대 초반에 정립된 정책기조(신정완교수의 “통화주의적 사민주의”)가 정권에 관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스웨덴의 부활’ 또는 성장과 평등의 균형이란, “80년대의 혼란기를 거쳐 새로운 시스템이 스웨덴 고유의 장점들을 흡수해서 제도적으로 안정적인 국면에 들어간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내 가정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렌-마이드너 모델은 거시적으로 볼 때 안정정책이었으며 동시에 동학적으로 볼 때는 노동자 주도의 구조조정정책이었다. 물론 마이드너의 기대와 달리 연대임금정책은 원래 모습대로 복원되지 않았다. 경제의 구조변화와 함께 금속노조(주로 수출대기업 산하)의 영향력은 눈에 띠게 줄어들었고 화이트칼라 노조와 공공노조 등이 하나의 중앙교섭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앞으로 첨단 벤처기업이 늘어나게 되면 업종의 다양성을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리로 포괄하는 임금결정제도를 만들기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 쪽에서도 기업별 분권교섭과 와일드캣 파업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1997년 “산업발전과 월급 형성을 위한 협약”이 보여 주듯 산별, 지역별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분권화된 중앙교섭이 복원되었고 부분적으로 금속노조의 리더십도 회복되었다. 여전히 80%에 가까운 조직율은 노조가 언제든 적극적으로 거시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이하 그림 스웨덴 모델의 부활 참조).
산업의 다양화와 불확실성의 증대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유효성도 의심을 받고 있지만(급변하는 환경에서 미래에 어떤 산업이 잘 나갈 것으로 알고 거기에 맞는 맞춤교육을 하겠는가?) 지방분권형 노동시장정책이 클러스터와 결합된다면 (네트워크의 정보효과로) 이 문제는 더욱 효과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전통의 보편적 사회서비스(교육, 보육, 의료 등)도 과거처럼 증가 일변도는 아니지만 GDP의 25%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스웨덴 국민의 복지와 고용을 동시에 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성평등 정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북구3국은 돌아가면서 성평등지수 1,2,3위를 차지하고 있다). 스웨덴 특유의 개인 과세와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지만 성평등정책(출산휴가와 육아제도 등)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율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고용율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앞으로 성평등이 더욱 진전되면 첨단산업이나 서비스산업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90년대를 거치면서 스웨덴이 산업구조 고도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에릭슨이 상징하는 IT산업이나 바이오산업, 그리고 사업지원서비스 분야의 클러스터(기업-연구기관-지원서비스의 지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데 폰투손 등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독일의 도제식 직업교육에 대비하여 스웨덴의 평등교육(특히 기초교육의 강화)에 연관시키고 있다. 협동을 체계적으로 훈련하는 북구형 교육이 네트워크형 협동을 필수로 하는 클러스터 발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모델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거시적 안정의 메커니즘이다. 자본이동과 변동환율제 하에서 안정의 닻(앵커)을 과거처럼 노동부문이 떠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좌파나 케인지언 쪽에서 격렬하게 비판하는 지점이지만 내가 보기에 스웨덴의 EU가입과 중앙은행 강화는 환율과 금리의 안정에 필수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케인스 역시 인플레이션을 줄곧 경계했으며 물가는 중립적 위원회(잉글랜드 은행과는 다른)가 관리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결국 그림에서 보듯이 렌-마이드너 모델은 수정된 상태로 보완되었다. LO-사민당의 거시안정정책은 EU의 안정협약과 중앙은행이 사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과거 산업사회 시절에 연대임금정책이 담당하던 역할은 더 넓은 사회 제도/정책들, 즉 분권화된 임금교섭, 성평등정책, 평등교육정책 등이 나눠 맡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처럼 노동자 주도의 구조조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클러스터의 발전은 다수 시민의 참여 속에서 지속적인 구조조정 역할을 하고 있다. 감히 가설적으로 말하자면 스웨덴, 조금 더 넓혀서 북구의 사회경제를 지배하는 정신은 기본적으로 ‘자제의 경제학’(economics of self-restraint)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변화에 적극적으로 ‘자조의 대응 경제학’(economics of self-help response)이다.
다만 마이드너가 시도했던 임노동자기금과 같은 장기적인 소유의 사회화 전략은 아직 찾을 수 없다. 금융자본주의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이 때,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역할(사회공헌 투자)은 분명 바람직해 보이지만 여기에서 길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과장일 것이다.
한국과 스웨덴 - 정반대 방법으로 유사한 성공을 거두다?
스웨덴모델을 공부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성장전략에 관해서 한국과 스웨덴이 보인 유사성이다. 우선 수출경제라는 점이 그렇고 또한 대기업 위주의 성장을 이뤘다는 점이 그렇다. 외환위기를 공통으로 겪었고 교육에 힘입어 IT등 산업구조 고도화에 성공한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러나 그런 성장을 향해 밟은 길은 거의 정반대다. 스웨덴이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등 전략을 고수했다면 한국은 줄곧 불평등 전략을 구사했다. 똑같이 임금을 억제했지만 스웨덴에서는 노동자가 스스로 했다면 한국은 군화발과 제도로 짓밟았다. 한쪽은 80-90% 조직된 노조가 거시 정책을 결정한다면 한쪽에서는 10% 남짓의 노조가 극한의 생존 투쟁을 한다.
똑같이 교육 면에서 최고의 성과를 자랑하지만 한 쪽은 평등과 협력교육을, 다른 한 쪽은 극단적 경쟁교육을 시키고 있다. 결국 성장률은 한국이 조금 높지만 평등에 관한 모든 지표는 극과 극을 보이고 있다. 내 이해가 맞다면 스웨덴은 신자유주의의 압력을 평등의 성장 흐름 안에 외적 규제로 흡수했고 한국은 신자유주의를 전 사회의 운용원리로 받아 들여 모든 부문에서 극단적 경쟁을 강요하고 있다. 사회 변화에 대한 개인의 마지막 대응은 출산인데, 한 쪽에서는 인구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출산율이 늘어나고 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출산율이 1.13까지 떨어졌다.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가치를 떠나서 과연 어느 모델이 지속가능할까? 내 원래 전공이 클러스터/산업정책이어서 그런지 나는 클러스터의 발전에서 두 모델의 지속 가능성을 본다. 평등이 다양성을 낳는 사회, 자발적 협력이 이뤄지는 사회가 아니고선 아무리 정부가 돈을 쏟아부어도(결국 기업도시/혁신도시로 변질된 참여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핵심은 클러스터였다) 클러스터는 위에서부터 쉽사리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민이 정책을 결정하는 사회에서는 생태의 지속가능성이 최우선의 가치로 주목받지만 건설업의 이해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자연은 파괴될 수 밖에 없다. 스웨덴이 자제와 자조의 모델이라면 한국은 강제와 타율의 모델이다. 한 쪽은 생명을 북돋우고 한 쪽은 생명을 죽인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